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화신 Dec 27. 2021

찢어 버리거나 불태울 글을 쓰는 이유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고 글이란 걸 한 달 만에 쓰는 건 아니다. 노트에다 나만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매일 쓴다. 하지만 이 행위를 두고 ‘글을 쓴다’고 표현하고 싶진 않다. 브런치에 쓰는 그런 글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 노트에 쓰는 글은,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글쓰기라고 말하는 정제된 작문이 아니다. 생각나는 것을 앞뒤 안 재고 주욱 휘갈기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기’라고 부른다. 글쓰기가 아니라.


실제로 나는 단지 생각 중이다. 머리만으로 하는 생각은 정리가 잘 되지 않고 명료하지도 않아서 글로 쓰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글은 생각의 도구일 뿐이다. 생각하는 데는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글을 도구로 빌려 쓸 뿐이다.


<말이 없다면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 간단히 ‘나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마 대략적으로 자신의 머릿속 이미지를 멀거니 바라볼 따름이다.

그렇다면 말할 때 머릿속 이미지나 의미를 억지로 말로 변환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언어는 생각을 태우는 자동차와 같다. 따라서 말이 없는 곳에 ‘생각한다’는 게 존재할 리 없다. 문법에 점령당한 언어활동이 있기에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무언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중


이 철학자의 말이 옳다. 우리는 언어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한다는 것은 언어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일이다.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못하는 생각은 그러므로 정돈되거나 여문 생각이 아니다. 노트에 무언가 떠오르는 대로 마구 적는 것은 표현의 행위인데, 이렇게 표현된 언어들은 내 안에서 완료된 생각들이다.


가령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노트를 펴고 볼펜을 들고 다음과 같은 글자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쓴다.


“2021년을 돌아보자. 올 한 해 대체 뭘 했지? <쓸수록 나는 내가 된다>를 출간한 게 가장 잘한 일 같다. 그에 못지않게 잘한 건 필라테스를 시작해서 1년 동안 지속한 일이다. 회사일과 병행하여 부업들도 열심히 했고, 책도 많이 읽었다. 미국 주식을 시작했는데 이건 좀 망했다. 아무튼 열심히 한 해를 산 것 같다. 내년에는 뭘 하면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지? 그래, 내년에는 모험을 하자. 지금까지의 내 삶은 너무 안정적이었다. 그만큼 내 세상은 단조롭고 좁아져 있었다. 2022년에는 내 세계를 확장시키려고 한다. 그 모험의 첫 번째로는… ”


이건 글쓰기가 아니라 생각하기의 과정이다. 내가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의식은 단 한순간도 가진 적이 없다. 말로, 활자로, 언어로, 글로 생각했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으로 ‘노트로’ 생각하는 습관이 내게 생겼다. 해야 할 어떤 생각이 틀을 갖추고 완성될 때까지 두 장이고, 세 장이고, 네 장이고 계속 주절주절 적는다. 이제는 노트와 펜 없이 그냥 머릿속에서만 굴리는 생각을 잘 못하겠다. 그건 너무 애매모호하고 어렵고 겉도는 느낌이 든다. 또한, 스스로가 그걸 '생각했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건 머릿속 이미지를 멀거니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내게 있어 글쓰기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원고처럼 잘 직조된 작문형 글쓰기와, 개인 노트에 쓰는 생각의 도구로써의 끼적임. 평소에 확실하고 명료하게 생각하는 시간, 즉 끼적이는 시간을 자주 가질수록 정제된 글쓰기 역시 잘할 것이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다른 사람은 생각할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한마디로, 뇌를 노트에 아웃소싱하여 쓰면서 생각한다. 그러니 그 노트를 간직할 이유는 없다. 찢어서 버리거나 불태우면 된다.


작가의 이전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