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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Oct 30. 2018

루드페이퍼

2018.10.30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제천을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어디 갈까, 하다가 다다른 곳이 제천이었다. 시기가 좋았는지 마침 제천 국제 음악영화제가 열리고 있던 시기였다. 평소 영화 관람을 누구보다 좋아했기에 남자 친구(현 남편)와 나는 자연스럽게 메가박스로 향했다. 음악영화제가 하는 줄도 몰랐으니 어떤 장르의 영화가 상영되는지 몰랐던 것은 당연지사. 몇 편의 줄거리를 대충 훑어보고 한 영화를 선택해서 관람하기까지 했다. 어떤 영화인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흑백영화였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았더랬다.


그렇게 영화를 관람하고 나와 뭘 할까 둘러보던 중에 듣게 된 소식! 밤에 축제가 열린단다. 야외 영화 상영과 영화음악 연주회, 그리고 에픽하이까지 온단다. 평소 에픽하이를 좋아하던 나와 남자 친구는 두말할 것 없이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하나둘씩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인근 주민들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의외로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게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영화를 관람했고, 음악을 감상했다. 그렇게 에픽하이의 무대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루드페이퍼


긴 레게머리를 휘날리며 한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자신을 루드페이퍼라고 소개했다. 레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이번 국제 음악영화제에는 자신의 레게 음악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해 이렇게 축하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간단한 인사말도 덧붙였다. 그리곤 음악을 시작했다. 평소 즐겨 듣지 않던 레게 장르의 음악이다 보니 처음엔 귀가 열리지 않았다. 아, 그래, 레게 음악이란 이런 것이지, 따위의 생각들이 스쳐 지났다. 그러다 문득 다음 노래를 소개하는 그의 멘트를 듣게 되었다. 지금은 헤어진 여자 친구를 생각하며 쓴 곡이라고. (라고 기억한다.) 그렇게 음악이 시작되었다. 첫마디가 시작되지 마자 우리는 온 마음을 그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레게를 하는 거친 목소리로도 이렇게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니. 연신 감탄과 감동을 이어가며 무대를 하염없이 바라봤었다. 그 노래의 제목은 '비 오는 밤에'였다. 


비 오는 밤에 - 루드페이퍼

비 오는 밤에 난 너를 기억해 너는 날 잊었겠지만
비 오는 밤에 난 너를 기억해 비처럼 지나가겠지만

비 오는 밤 우산도 없이 혼자서 걷고 있는 난
너와 내가 빗속에 남긴 아련한 추억을 꺼낸다

너와 내가 걷던 그 골목엔 이젠
니가 미소 짓던 그 옆엔 이젠
늦은 밤에 노의 그 집 앞엔 이젠
누군가 날 대신하겠지 이젠

넌 나를 보고 난 너를 봤지 한없이 비 내리던 밤
빗물인지 눈물인지 서로의 두 뺨에 흘렀다

너와 함께 듣던 노래들도 이젠
너의 눈에 있던 내 모습도 이젠
너와 함께했던 약속들도 이젠
서로가 잊어야 하겠지 이젠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이 밤이 끝나고 나면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나는 널 잊을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몇 번이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지금 들어도 너무 좋은 음악이다. 멜로디도, 가사도, 무엇 하나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없다. 사실 그랬다.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이 음악을 끝까지 모르길 바랬다. 누구에게나 나만 알고 싶은 명곡이란 게 있는 것처럼, 이 음악만큼은 끝까지 나만 알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TV를 보는데, 갑자기 루드페이퍼 보컬(쿤타)이 나왔다. 모 종편 채널의 음치를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루드페이퍼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동의 속에 음치라고 판명이 났고, 진실의 무대 위에 올랐다. 그리고 시작된 음악, 그가 부른 곡은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 였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곡을, 오직 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방송을 보고 나서 사실 초조했다. 당시의 그 프로그램은 실력자가 나온 이후에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고, 실제로 출연을 통해 인기를 얻어 제대로 데뷔하는 케이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루드페이퍼라는, 쿤타라는 사람이 대중적인 인기를 갖게 된다는 것에 조금 불안함을 갖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극히도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땐 그랬다. 왜 하필이면 내가 최애 하는 그 가수가 이런 유명한 방송에 나와서 노랠 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도 다 알게 되면 안 되는데 라며 말이다. 방송 이후 그룹의 이름과 그의 이름은 몇몇 실시간 차트에 검색되기도 했다. 하지만 근래의 가요시장이 그렇듯 숱한 아이돌들의 쏟아지는 앨범 홍수 속에 그는 더 이상 튀어나오지 않았다.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복잡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음악을 듣고, 공감하고, 호응하고, 좋아해 주면 이들은 더 나은 노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될 텐데, 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고 아직 루드페이퍼나 쿤타의 이름은 그리 대중적이지 않다.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의 비중이 더 높다. 하지만 인지도가 낮다고 해서 그들의 실력이나 진심이 모자라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음악에 있어서 개개인의 취향이 있듯, 나처럼 누군가도 이들의 음악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 계속 그들의 음악을 궁금해하고 기다리는 동안 더 많은 음악을 들어보고 싶다. 루드페이퍼 화이팅! 쿤타 멋져요! 내가 (잘은 모르는) 팬입니다!!!


TMI. 보컬 '쿤타'님은 한국예술원에서 힙합과정 교수님이시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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