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히 Apr 03. 2022

여기엔 짐을 실어 보내자

스포츠카라는 생각은 굳이 하지 말고

남편은 계획이 있었다. 사실 제주도행을 결정하기 전부터 늘 마음 한편에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고 늘 이야기하던 계획이긴 한데, 숙소 예약이 그 도화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바로 '드림카를 끌고 제주도 해변을 달리는 것'이다. 나는 남편에 비해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나 흥미가 현저히 낮았던 탓에 자동차의 브랜드, 차종 같은 것들에 대해서 모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제대로 알고 있는 정보조차 부족한 나에게 남편은 늘 특정 차를 손꼽으며 딱 1년만 타보고 싶노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족히 2~3년은 들었던 것 같다. 차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직장인들이 흔히 타는 보급형(?) 자동차와 남편이 말하는 스포츠카는 사실 내가 봤을 땐 흰색이냐 검은색이냐 정도의 차이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차에 대해 무지렁이인 나에게 남편이 가장 열심히 어필했던 것은 바로 하차감이었다. 그래, 이 단어는 근래에 들어본 적 있는 말이다. 보통 얼마나 편안한 주행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게 승차감이라고 한다면, 목적지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릴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우와, 저 차봐!" 라며 차에 관심을 가져주는 상황이 바로 하차감이란다. 근데 내가 알고 있는 남편 성격으로는 남들이 주목하거나 관심 갖는 것에 대해서 어색해하는 편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 어색하고 불편함이 자동차에는 적용되질 않았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영영 차를 바꾸겠다는 건 아니었다. 소위 유지비나 관리에 대한 부분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깔끔하게 딱 1년만 타고 차를 다시 정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왜 이렇게까지 열성적으로 의지를 어필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만큼 타보고 싶었다는 뜻이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더더욱 굳이 차를 바꾸는 걸 반대할만한 명분이 없었다. 꾸준히 돈도 열심히 모으고 있었고, 차량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플랜도 갖고 있었다. 일련의 이런 목표와 계획을 보고받은 나는 기어이 남편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남편이 타보고 싶다던 드림카는 매끈한 바디를 자랑하는 올블랙의 스포츠카였다. 달리는 말의 모습을 형상화한 엠블럼이 돋보이는 스포츠카. 반짝이는 검은 광택에 반사되는 제주의 햇빛을 조명삼아 해안도로를 달리는 상상을 하고 있는 듯한 남편의 눈빛을 보며 차종이 무엇이 되었건 원하는 차를 타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런저런 일련의 과정을 거쳤고, 드디어 차량을 인도받는 날이 되었다. 근무시간과 차량을 인도받는 시간이 맞지 않은 관계로 남편의 생애 첫 스포츠카의 인도는 내가 받게 되었다. 차량이 도착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고, 이윽고 반짝이는 검은 스포츠카 한대가 우렁찬 배기소음을 내며 주차장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아, 저 차로구나! 근데... 뭐지...? 말로 듣고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뭔가 훨씬 멋있어 보였다. 오랜 기간 남편의 사탕발림 같은 말들로 내가 어떻게 된 건가, 이게 뭐라고 또 이렇게 멋있어 보일 일인가 싶었다. 그렇게 잠깐의 감탄을 뒤로하고 몇 장의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전송했다. 사진을 보낸 지 채 3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남편은 아주 빠른 속도로 두 글자짜리 답장을 보냈다. "쩐다..!" 그래, 몇 년간의 노랫말 속에 있던 그 차가 바로 우리 집 주차장에 들어와 있다 욘석아. 남편은 소식을 듣자마자 제주도에 이 차를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면서 쾌재를 불렀다. 


사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준비하면서 고민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차량이었다. 쉼과 힐링을 위해 떠나는 한 달짜리 여행이니 차 한 대는 무조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흔히 쓰는 다양한 렌터카 쉐어링카를 검색해 보았지만 30일 치의 렌탈비용과 주유비를 생각하니 계획했던 예산보다 커진 금액이 적잖이 당황하고 있던 터였다. 브랜드와 차종을 고급옵션으로 바꾼다면 월 200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을 들여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편이 차를 바꾸는 걸 좀 더 서두른 모양이다. 살면서 언제 다시금 제주도에서 한 달 동안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집과 차와 숙소 등 가서 누리고 지낼 것들에게 대해 아쉬움을 갖지 않도록 잘 준비를 해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스포츠카를 산건 조금 급발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본인이 원하는 차를 제주도에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쁜 마음으로 무려 인천에서 제주공항까지 차를 보내는 탁송 의뢰까지 착착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주도에 가져가기로 한 여러 짐들도 차에 실어 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걸 끝까지 어필하며, 차를 볼 때마다 하트로 바뀌는 남편의 눈빛을 오늘도 보고 있다.



남편의 드림이 꼭 나의 드림은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보, 변수가 생겼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