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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Apr 19. 2022

왜 제주에는 유채꽃밭이 많은가

제주도의 봄에는 노란색이 핀다

제주를 상징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다. 돌하르방은 당연하고, 동백꽃, 유채꽃, 귤 등 제주도를 떠올렸을 때 나열할 수 있는 이미지들만 세어도 두 손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봄의 제주도는 유채꽃의 향연으로 물들기 일쑤다. 내륙에서의 봄은 단연코 벚꽃으로 점철된 계절이지만 제주도의 4월은 달랐다. 제주의 4월은 샛노란 유채꽃이 섬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제주도에 오기 전까지 이 말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나고자란 내가 봄에 만난 벚꽃은 여의도 윤중로나 진해 군항제나 가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지, 우리 일상 속에서 흐드러지게 잔뜩 피어있는 모습을 보는 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나 자치단체에서 작정하고 벚꽃나무를 길가에 심어주지 않는 한 도심에서 봄의 상징을 마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봄을 대표하는 꽃들이 만발한 계절이라며 뉴스에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9to6의 출퇴근을 졸린 눈으로 버스와 전철에 실려 다니던 시절에는 그 만발함을 즐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봄꽃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인 면도 없잖아 있었다. 굳이 시간을 내어 어디를 가야만 볼 수 있고, 그마저도 엄청난 인파를 감내하고 봐야 한다는 생각에 봄꽃놀이는 오히려 적당한 피곤함이라는 이미지를 함께 달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의 봄과 유채꽃의 존재는 남달랐다. 적어도 내가 만난 4월의 제주에서는 말이다.


섬의 왼쪽에 위치한 숙소를 떠나 제주의 어디를 가더라도 목적지와의 거리가 최소 30분 이상이다 보니 숙소를 나와 어느 방향으로 가면 어떤 동네가 나오는지에 대해서 남편은 이미 맵 마스터가 되어 있었다. (길치&방향치인 나로서는 신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보니 내가 목적지를 정한 후에 지도를 보여주면 눈대중으로 쓱 훑어보고는 좌우 둘 중 한 방향을 골라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매일매일의 여행길에는 놀랍게도 단 한 번도 유채꽃이 안 보였던 적이 없었다. 물론 우리가 머무는 숙소가 제주시 한가운데 있는 도심이 아니라 한림읍 월령리 어딘가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마을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매일매일을 유채꽃을 본다는 점은 꽤나 신기한 경험이기도 했다. 살면서 이렇게 매일매일 원색적인 꽃을 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드넓은 꽃밭을 매일매일 눈에 담아본 적이 있던가? 나는 아무래도 그런 경험은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여행 첫날 도로에서 뜬금없이 마주한 거대하고 광활한 유채꽃밭은 아름다움은 둘째 치더라도 다소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한두 개가 아닌 지나다니는 모든 길목을 마치 제 집인 양 점령해버린 유채꽃. 이 정도면 자연스럽게 피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하고 심어놓은 것이 분명했더랬다. 몇 해 전 뉴스 보도가 순간 머리를 스쳤다. 제주도에는 굉장히 많은 유채꽃밭이 있고 봄의 제주를 찾은 사람들이 이 유채꽃밭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의 기념사진을 촬영하자 유채꽃밭의 주인들이 이를 그냥 넘기지 않고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에게 몇천 원의 돈을 받는다는 소식이었다. 사실 그 뉴스를 접했을 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저 유채꽃밭은 필시 누군가의 사유지였을테고, 그 사유지에 정성스레 심어놓은 유채꽃밭 사이로 사진을 찍겠다는 미명 하에 길을 내고 들어가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밭주인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충분히 받을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에게 그 기사는 그 정도로 유채꽃밭이라는 존재가 꽤나 귀하고 멋진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제주도로 자유여행을 왔다는 친구들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했다. 술을 단 한 모금도 입에 댈 수 없었던 나는, 나 때문에(?) 덩달아 금주를 실천하고 있는 남편이라도 간만의 즐거운 술자리를 한 번쯤 가져보길 바라는 마음에 '술을 마실 거라면 택시를 타고 이동을 하자!' 라는 의견을 내세워가며 찜해둔 고깃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택시를 잡아탄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소한 호기심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낯선 타지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으레 나오는 주제가 있다. '땅값'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도 여지없이 이 동네의 땅값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평당 얼마쯤 할 거라느니, 몇 평을 사서 그 땅에 뭘 할 거라느니 등의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싼값에 농지를 사서 용도변경을 해서 집을 짓고 살아도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땅값에 관한 이야기의 거의 끝자락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다만 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건축과 설계의 실무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의 끝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던 중 내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요 며칠 제주도를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유채꽃이 잔뜩 심어진 큰 꽃밭이 생각보다 많더라고. 근데 이 꽃밭이 외진 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제주시 시내에도 뜬금없이 넓게 펼쳐져 있던데, 농지가 비싸지 않다면 시내의 그런 곳을 매입해도 되는 거 아냐? 이왕 살 거면 시내 쪽을 사면 나중에 용도변경하고 건물 지어도 좀 높게 쳐주지 않을까?"


내가 던진 질문이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어 무언가 새로운 대화가 이루어질 참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달랐다. 용도변경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해달라고 다 해주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농지로 구입해서 용도변경을 하지 않은 채로 땅에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리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벌금을 낼 수도 있다는 둥 여러 의견이 나왔다. 농지라면 응당 농사를 짓기 위한 땅일 테니, 땅의 소유 목적에 맞게 작물을 심어 농지로써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오자 우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택시기사님이 드디어 운을 떼었다.


"그래서 제주도에 유채꽃밭이 많은 겁니다."


네? 그래서라니요? 갑작스러운 기사님의 대답에 나는 잠시 당황했고, 유관분야 실무자(?)들은 이게 무슨 말이냐며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으로 기사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이들의 질문 주제는 '꽃은 작물이 아니라서 농지에 심어봤자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사람이 재배하고 수확해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을 재배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기사님의 대답이 이어졌다. 


"유채꽃은 그냥 꽃이 아닙니다. 제주도에서는 유채꽃을 작물로 인정합니다. 유채꽃은 꿀을 만들 수도 있고 기름을 짤 수도 있어요. 유채꽃에서 얻을 수 있는 부수익이 가치가 농작물로써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만큼은 유채꽃을 작물로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주 곳곳의 넓은 땅 주인들이 그 큰 땅에 유채꽃을 심어놓는 거죠. 작물이기 때문에 벌금을 내야 할 필요도 없고요. 요즘 꿀벌들이 많이 없어져서 꿀 값이 오른다고도 하는데 유채꽃꿀은 벌이 만드는 게 아니라서 그럴 걱정도 없어요."


택시 기사님의 이 말을 듣자 제주도에서 마주친 무수히 많고도 넓은 유채꽃밭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그 많은 꽃밭들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무언가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 기분이었다. 아, 제주의 봄을 알리는 그 많은 유채꽃들은 단순히 관광객 눈에 보기 좋으라고 심어져 있는 게 아니었구나, 세상만사 모든 존재에는 그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는 거구나. 유채꽃은 제주에서는 작물로써의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의미 있는 식물이었구나. 샛노란 꽃봉오리가 봄과 찰떡처럼 어울린다며 그저 수천 송이의 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단순히 꽃이 꽃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고 말이다.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회사 어느 팀 소속이 직책 아무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식으로, 부모로, 배우자로, 친구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들 속에서 각각의 존재의 이유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서로 존중받고 인정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흔하디 흔한 유채꽃밭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장황한 결말을 맞이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뭐 어떤가. 어디서라도, 무엇에서라도 느끼고 배우는 바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왜 이런 말투로 끝맺음을 맺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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