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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Apr 21. 2022

맛집은 은근히 애매한 곳에 있다

주차는 어디에 하면 되나요

제주도에 먹으러 온건 아니다. 먹부림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렇게 뛰어난 미각을 가진 사람도 아니거니와 입맛이 둔한 탓에 상한 음식도 잘 가려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입맛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맛집 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집을 찾아다닌 이유는 어느 순간 생겨버린 허세끼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SNS 때문이야.


늘 독립을 꿈꾸었지만 상황상 독립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란 탓에 20대 중반이 되어서도 독립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하게 된 독립이란 게 독립치곤 꽤 극단적인 거리로 멀어졌는데,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것이다. 무려 10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호주 시드니에서 반년 동안 집도 구하고 이사고 하고 일자리도 얻어 일하며 깨달은 게 있다면 '한 끼라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서구적인 식습관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매일매일 이어지는 샌드위치와 스테이크의 향연 속에서 내 위와 장은 연신 힘듦을 토로했지만 천만다행으로 당시에 내가 일하던 식당이 뼈다귀 해장국을 취급하는 한식당이었다는 점에서 머나먼 이국에서의 독립은 견딜만했다. 그때는 사실 맛집의 존재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입에 김치 몇 조각이라도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던 시기였다. 한식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사람 앞에 맛집은 그저 사치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10년 만에 남편과 다시 시드니를 찾았을 때 제대로 된 맛집을 데려가지 못한 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맛집에 대한 관심은 시드니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커지게 되었는데, 다니던 회사에 복직을 하고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부산 해운대로 파견을 나가게 된 적이 있었다. 준비할 기간도 짧아 단 며칠 만에 집을 구해 부동산을 계약하고 짐들은 택배로 부쳐 받아야 했더랬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해운대에서의 생활을 앞두고 근엄하고 진지한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그 생각의 주제가 바로 맛집이었다. 내 비록 무덤덤한 입맛에 주는 대로 아무거나 잘 먹는다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해운대인데, 지인이라도 온다고 하면 제대로 된 밥 한 끼는 사멕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는 야근이나 주말출근도 많지 않았던 터라 퇴근 후 시간이 남는 족족 해운대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내 나름대로의 맛집을 찾아다니려고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무작정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닌 탓인지 맛집 리스트는 쉽게 완성되지 않았고, 빙수 맛집과 돼지국밥집 하나만을 남긴 채 나의 해운대 맛집 리스트는 그렇게 조용히 사라졌다.


결혼을 해도 입맛 사정은 특별하게 달라지지 않았다. 거점지역이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동했다는 것 외에는 똑같은 회사생활과 똑같은 동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무료한 일상이었다. 나나 남편 모두 주는 대로 잘 먹는 타입이다 보니 주말에 시간을 내어 굳이 맛집을 찾아간다던가, 맛집 앞에 줄을 서가면서 무언가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기다려가면서까지 먹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퇴사였다. 14년간의 직장생활을 뒤로하고 퇴사를 하게 되면서 나의 식습관에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12시 정각이면 회사 근처의 식당을 찾아 먹던 점심도, 오후 5시면 어김없이 찾아가던 바지락 칼국숫집을 갈 일도 없어진 어느 오후. 나는 지금이 드디어 맛집을 찾아다닐 기회라 생각했고, SNS에 각종 해시태그들을 검색해가며 이름난 맛집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맛집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홍보의 영향으로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던 적도 있었고,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기대 이상의 맛으로 놀랐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여러 식당과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나름 인천의 맛집 지도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기쁨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한 달짜리 제주여행을 와버린 것이다. 가장 최근까지도 강화도로 차를 몰아 유명 난 파스타를 먹어보겠다며 설레발치던 그 사람이 지금 제주도에 와있는 것이다. 두근두근. 내륙지방과는 또 다른 새로운 맛집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두근 반 세근 반이었다. 사실 맛집을 찾아가 보는 다른 이유가 있다면 '드라이브'를 꼽을 수 있다. 차를 몰고 맛집을 찾아가는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점도 굳이 맛집을 찾아가는 소소한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드라이브가 아니더라도 뚜벅뚜벅 걸으며 지도를 켜고 맛집을 찾아가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만큼이나 즐거운 것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맛집 간판 앞에서 '드디어 찾았다! 여기는구나!'라는 감탄사를 속으로 내뱉으며 얻는 기쁨 또한 맛집 여행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나는 이 기쁨을 제주도에서도 누리고 싶었다.


집에서 요리를 자주 해 먹지 않던 우리 부부는 그래도 시간이 날 때면 맛있다는 식당을 찾아가 보는 걸 좋아하긴 했다. 물론 찾아가는 식당들이 유명 난 식당이 아니라 줄을 설 필요도 없었지만, 그래도 만족할만한 맛을 복 난 이후부터는 밖에서 한 끼를 먹더라도 우리가 먹고 싶던, 그래도 그중에 맛있는 음식을 먹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그 생각이 제주도까지 따라온 것이다. 매 끼니를 맛집에서 해결할 수는 없지만 바깥을 돌아다니는 일정이 있는 날에는 최소한 한 끼 정도는 유명한 곳에서 먹어보자는 다짐을 한 것이다. 그렇게 1외출 1맛집이라는 무언의 룰을 정해놓고 시작된 폭풍 검색. 온갖 SNS에서 지역명과 맛집, JMT, 내 돈 내산, 숨은 맛집 등 다양한 해시태그를 거쳐가며 맛집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얕은 수준(?)의 해시태그라 주로 광고 콘텐츠가 많이 걸려들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보석 같은 맛집을 하나둘씩 가려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검색을 통해 찾아낸 맛집들을 지난 2주 동안 서운하지 않게 돌아다녔다. 예전에 먹어본 음식들을 제외하고 새로운 맛집들을 찾아내려니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 맛있고 배부르게 먹고 나오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 쉽게 포기하기도 어려운지라 귀찮음을 감수하고도 제주도의 동서남북으로 맛집들을 찾아다닌 것이다. 그렇게 맛집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이 바로 '맛집은 은근히 애매한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제주공항 근처를 필두로 한 윗동네는 늘 가득한 차량과 넘쳐나는 사람들로 여기가 제주인지 인천인지 서울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에 잘 가지 않게 되었고, 그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중에서 맛집을 찾다 보니 드넓은 청정제주에 맛집들이 꽤나 애매한 곳으로 향하게 됐던 것이다. 포털사이트에 등록된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제대로 입력하고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주소가 알려준 곳은 맛집이 아니라 웬 폐허 공장 앞이었다던가, 정말 인적도 드물고 동네 주민만 살고 있는 동네인 것 같은데 위치하고 있어서 의외였다던가 하는 곳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강식당 제주편을 촬영한 식당(선인장식당) / 협재 해수욕장의 외쿸너낌 식당 / 가오픈중이라는 흑돼지집(협재고기부엌)
감자와 양파로 맛을 낸 파스타 / 함박스테이크같은 돈까스 (로드129)
단일메뉴 불고기정식(달팽이식당) / 고구마 맛만큼은 진리라는 고구마치돈(로드129) / 튀김옷이 독특했던 파전(금능제면소)
국물이 독특했던 보말칼국수(금능제면소) / 백년초 색깔이 예쁜 파스타(신스버거)
패티가 맛있는 수제버거(신스버거) / 정성과 맛을 동시에 잡은 수제소시지(MANO)


1. 제주도 맛집 하면 단연 1위로 떠오르는 돈가스집엘 한번 가보겠다며 호기롭게 오전 11시에 도착한 적이 있는데, 그 식당의 인기는 도내에서도 가히 정점에 있는 터라 당일 11시에 도착한 우리는 돈가스 냄새도 맡지 못하고 돌아 나온 적이 있었다. 기껏 찾아왔더니 줄도 못 서보고 돌아서야 하는 그 순간에 굉장히 짜증이 났지만 바로 다음날 폭풍 검색을 통해 찾아낸 숙소 바로 옆 생선가스 집에서 인생우동과 인생 생선가스를 맛보기도 했다. 사실 이 돈가스 집도 방송에서 연예인이 찾아간 적이 있어서 더욱 유명해진 케이스였다. 숙소 바로 옆에 있어서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을 뿐, 주말에는 1~2시간 웨이팅이 기본이더라. / 서황


2. 어느 날은 폭풍우 몰아치는 늦은 밤,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지방도로를 가로지르기엔 너무 무서워서(?) 일단 눈에 띄는 카페 같은 데서 비를 좀 피하자며 찾아 들어간 곳이 카페라 아니라 닭볶음탕 집이었고, 심지어 눈이 동그랗게 떠질 만큼 맛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 식당은 1년 후 식구들을 데리고 또 찾아갔다.) 맛집으로 이름난 곳도 아니었고, 그렇다 보니 손님도 적었고, 손님이 적다 보니 굳이 알바를 써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 주인장 한분이 요리와 서빙을 모두 담당하고 계셨다. 생각해보니 그 닭볶음탕 집은 가게의 상호마저도 뭔가 식당스럽지는 않았다. 카페 같은 상호, 정원 같은 외관인데 식당이라니. 진심으로 맛있다니. / 별이내리는정원


3. 며칠 전 갔다 온 맛집은 주소를 입력하고 찾아갔지만 식당이 있어야 할 곳에 식당은 없었고, 당황한 나머지 앞으로 좀 더 이동해보니 그곳에 있었더라는(?)... 흑돼지와 통 갈치로 점철된 제주도의 맛집 식당 리스트 사이에서 그 두 가지를 제외하고 다른 음식을 먹어보자며 찾아간 곳인데 주 출입로가 이런 곳에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뜬금없는 곳에 식당이 있어서 놀라기도 했다. 주 메뉴는 불고기 정식 단 1가지 메뉴였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차량과 손님을 보며 '이 사람들은 대체 여길 어떻게 찾아온 거지' 하고 놀라기도 했다. 우리가 헤맸으면 저 사람들도 당연히 헤맸을 거라며. / 달팽이 식당


4. 숙소 근처의 해변가를 거닐다 '그래도 흑돼지 한 번은 먹어보자'며 바닷가 끝자락에서도 더 끝자락에 있는 식당 간판만을 쳐다보며 찾아갔더니 낡고 허름한 외관에 한번 놀라고, 그래도 영업 중인 식당인 것 같으니 들어가 보자 하고 들어가 보니 세상 깔끔하고 고급진 인테리어에 심지어 가오픈 상태였던 식당도 있었다. 7~8가지에 달하는 흑돼지구이 소스에, 말도 안 될 정도로 예쁜 바다 뷰를 통유리창으로 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가게 앞으로 나와 건물을 비주얼을 다시 한번 봐도 여기에 이런 식당이 있을법하지는 않다는 의외의 이미지에 마지막까지 묘한 감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하지만 조만간 신혼여행을 온다는 친구를 여기로 데려갈 예정이다.) / 협재고기부엌


5. 몇 해 전에는 우리가 묵었던 숙소 건물 바로 옆이 맛집이었던 적도 있었다. 같은 주인이 건물 한 동은 숙박으로 해놓고 바로 옆 건물에서 흑돼지&문어 통구이 식당을 했는데 이 식당의 위치도 번화가나 해변가와는 전혀 상관없는 위치였다. 그냥 해안도로 한켠, 클린하우스를 바로 옆에 끼고 있는 흔한 제주도식 집처럼 보였는데 이 식당의 매력은 밤이 되어야 알 수 있었다. 저만치 멀리서 오징어잡이 배로 추정(?)되는 배들이 하나 둘 불을 켜면 바다 위 멋진 조명 라인이 생겨나는데 그 모습이 꽤나 낭만적이었다. 재밌던 건 비슷하게 생긴 바로 옆 건물이 우리 숙소였는데, 밤이면 건물 외관의 예쁜 조명을 켜놓고 잔디 깔린 마당에 나와 맥주를 먹고 있으면 식당을 찾아온 사람들이 카페나 가게인 줄 알고 숙소로 진입을 시도했던 점이었다. 대문도 있고 담벼락도 있었지만 누가 봐도 그 위치는 숙소가 있을법한 위치도 아니었고, 외관 디자인도 너무 예쁜 탓이었다. / 미친흑돈


1,2시간씩 줄을 서가며 먹었던 고기국수의 비린 맛에 맛집 따위 눈길도 주지 않겠노라며 다짐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숨은 맛집이 또 어디 있을까 하며 SNS를 뒤적거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소소하게 즐겁다. 미식가들이 먹으면 이게 무슨 맛집이냐며 내 입맛을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제주도의 이런저런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위치에 놀라고 맛에 만족하는 지금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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