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히 Apr 24. 2022

제주의 금토일월

여행의 요일 패턴

보통 주말이라 함은 토요일과 일요일을 일컫고, 휴일이라 함은 법정공휴일까지 포함해서 범위가 꽤 넓어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4월에는 평범한 주말을 제외하고 다른 휴일은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목일이 공휴일이었지만 해제된 지 오래다. 특별한 이슈 없이는 별다른 공휴일이 없다 보니 순수하게 주말만 쉴 수 있는 몇 없는 달이다. 그런 이유로 청명하고 날씨 좋은 4월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말을 포함해 제주도에 오는 경우가 더욱 많은 것 같다. 


제주도에 와서 한 번의 주말을 보내고 두 번째 주말을 앞두고 있는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은 확실히 평일과는 다른 느낌이다. 평일 대비 늘어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그들이 빌려온 하, 허, 호로 시작하는 수많은 렌터카들이 즐비한 해수욕장에는 발 디딜틈은 고사하고 주차장 진입까지 족히 30분은 걸릴 정도로 구석구석이 붐볐다. 평일엔 긴 대기시간 없이 빈자리를 찾아 자리 잡고 앉을 수 있던 식당도 금요일 낮부터는 예약 없인 밥을 먹을 수조차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비단 주말 특수가 적용되는 것이 제주도 뿐만은 아니겠지만 일상과 업무가 공존하던 서울이나 도심 수도권과는 다르게 제주도는 쉼과 힐링과 여행을 목적으로 찾아온 이들이 많은 만큼 더욱더 북적이는 주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제주'의 '4월'과 '봄날'이라니, 이 얼마나 환상적인 단어의 조합이란 말인가.


셀프 주차장 한 편의 청보리밭 조차도 이렇게 여유로운 것을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 중에 하나는 '일을 너무 많이 하지 않을 것'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프리랜서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면서 직장인의 출퇴근과 다름없는 (어떤 날은 빡센 야근을 할 정도로) 분량의 일을 하며 지냈는데, 제주도에서만큼은 집안에 콕 박혀 일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일은 최소한으로 하기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주말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나는 하물며 집 앞 카페도 아닌 숙소 한편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편이 친구의 결혼식 참석으로 집을 비운 다기에 혼자서 집 지킴이가 되겠노라 선언했지만, 일단 집 밖을 나서면 마주쳐야 하는 수많은 인파를 오롯이 혼자 견디기가 싫다는 이유도 지금 내가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숙소가 있는 월령리에는 특히 선인장이 멋진 올레 14코스가 관통하는데, 그 길 중간에는 내가 100번은 더 돌려본 tvN 신서유기 프로그램에서 번외로 촬영한 '강식당' 편을 촬영한 식당이 있다. 당시 프로그램에서 판매되던 음식이 아니라 제주 토속음식들이 주 메뉴인데 꽤나 맛있었다. 그보다 방송 촬영을 했던 곳인 데다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산책로 또한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쁘다 보니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과 차량들이 꽤나 몰려오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붐비는 길을 피해 지나가려는 사람들의 차량행렬이 종종 눈에 띄는데, 그 사람들의 눈에는 터벅거리며 슈퍼로 향하는 내가 제주도민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그냥 그런 생각도 종종 해본다.

번외의 이야기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tvN의 '신서유기'라는 프로그램을 매우 매우 좋아한다. 인터넷 버전으로 나오던 시즌1부터 2022년 4월 기준까지 방영된 시즌8까지 단 한편도 빠짐없이 수십수백 번을 다시 보고 또 보고 대사와 장면을 모조리 외워버릴 만큼 말이다. 번외 편으로 제작된 프로그램인 '강식당'과 '꽃보다 청춘'도 마찬가지로 수십 번을 다시 봤는데 그중 강식당 제주도 편을 매우 재미있게 봤다. 우리 집은 24시간 TV가 꺼질 일이 없는데, 특별히 챙겨보는 프로그램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99%의 확률로 신서유기가 재생되고 있다.

아무튼, 주말의 제주도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집 앞의 새로 생겼다는 카페에도 삼삼오오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모닝커피 한잔에 인증샷을 찍으며 #제주도여행 #모닝커피 #월령카페 #커피맛집 같은 해시태그를 붙여가며 SNS를 하고, 그 와중에 나는 '커피는 스타벅스지!'를 외치며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협재해변까지 넘어가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와 샌드위치를 사 가지고 돌아온다. 기념품을 사기 위해 북적이는 매장을 뒤로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슬리퍼를 끌며 어슬렁거리는 8개월 차의 임산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지금 밟고 있는 땅이 제주도라는 점은 후줄근한 행색 따위는 무심히 넘겨버릴 만큼 어딘가 기분 좋은 일이다. 오늘내일이면 대부분 떠날 관광객들 사이에서 나 홀로 여유로운 척하며 느긋하게 버스정류장에 앉아 15분 후에 도착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설레는 일이 될 줄이야.


나도 그랬다. 직장인이라면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존재, 월요일. 회의라는 미명 하에 연차로 맘대로 쓸 수 없는 월요일이 당장 내일이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일요일 아침 11시를 꽉 채운 체크아웃을 하고 비싸 돈 들여 빌린 자동차에 캐리어를 실어 공항 근처 맛집이나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묻어났던 아쉬움에 몸부림치던 적이 있었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오늘 집으로 돌아가 여행을 정리하고 다시 내일부터는 일상으로 돌아가 일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까. 길어야 3박 4일짜리의 짧은 휴가가 못내 아쉬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지금 여유롭다! 너무 여유로워서 그만 여유롭고 싶다(?). 내일부터는 제주도의 머나먼 동쪽으로의 새로운 여행루트를 따라갈 것이다. 


인천에서 1시간 반이면 충북 제천도 놀러 갈 거리인데 제주도에서는 섬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가는데만 해도 거의 2시간 여가 소요된다. 제주도는 결코 작은 섬이 아니다. 이전의 여행들에서는 늘 이점을 간과하고 3박 4일의 여행루트에 제주 방방곡곡을 욱여넣어 조금은 피곤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침은 성산일출봉, 점심은 서귀포 중문, 저녁은 애월에서 먹는다는 여행 일정이 생각보다 빡빡하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채다니. 내가 운전을 안 한 탓이다. 법에서 인정하는 운전경력으로만 치자면 내가 남편보다 경력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버스까지 몰 줄 아는 베스트 드라이버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남편에게서 운전대를 빼앗아 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어찌 됐건 내가 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동안 남편에게 무리한 일정을 강요한 건 아닌지 슬쩍 돌아보게 됐다. 그 누구보다 휴식과 힐링에 진심인 남편에게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일정을 빽빽하게 쓰고 싶었던 건 제주도를 자주 올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기껏해야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데, 그 와중에 널널한 일정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모든 이야기가 변명처럼 느껴지지만 별 수 없었다. 그때는 직장인이었으니까. 마음같에서는 월요일까지 하루 더 연차를 내고 좀 더 여유를 즐기고 싶었지만 실시간으로 울려대는 휴대폰 속 클라이언트의 이름들을 보며 '내가 지금 쉬어도 되는 때인가'를 고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비슷한 이유로 주말을 포함해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유독 빠르게 움직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 빨리 보고 빨리 사진 찍고 빨리 다음 스팟으로 넘어가고 싶은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보니 또 그 나름대로의 LTE 같은 일정 소화 속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은 안타까운 점 중 하나는 제주도는 생각보다 월요일에 쉬는 곳들이 많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일요일에 제주도를 떠나는 관광객들의 비중이 높다 보니 돌아오는 월요일은 전날인 일요일에 비해 한산해진다. 북적이던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확연하게 줄어들다 보니 많은 가게들이 월요일을 휴점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막상 월요일까지 제주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인 월요일에 더 많은 곳을 보지 못하고 갈 확률이 생겨버리고 만다. (그래서 차라리 똑같은 3박 4일이라면 목금토일 이렇게 놀러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사실 요일과 날짜가 중요할까. 바쁜 일상을 쪼개 다만 며칠이라도 제주도에 머물며 여유를 만끽하고 싶은 그 마음이 중요하지. 관광객들로 북적이면 또 어떻고, 유명한 식당이나 관광지의 대기시간이 길어져도 괜찮다. 그 모든 시간의 조각들이 모여 추억이 될 텐데 말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여유는 다음에(?) 즐기도록 하고 우선 이번 제주 여행은 잘 놀다 가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맛집은 은근히 애매한 곳에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