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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자 Mar 07. 2018

영사실에서

영사실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상영관은 어둡고 고요했다. 객석에 앉은 이들은 미세한 빛을 머금은 스크린에 집중했다. 그들은 등 뒤의 존재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객석의 모든 좌석은 스크린을 향했고 관객들의 시선 역시 스크린을 향했다. 백지처럼 희고, 커다란 스크린이었다. 영사기의 램프가 점화되고 빛을 뿜어내면 필름에 갇혀 있던 배우의 얼굴은 스크린에 가닿았다. 손가락 두 개로 가려지는 작은 필름과 연관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예쁜 얼굴이었다. 영사기는 굉음을 내며 필름을 무섭도록 빨아들였고, 플래터에서 풀려나온 필름은 영사기를 거쳐 수줍게 다시 플래터로 돌아왔다. 끊어질듯 휘청이면서 영사기로 빨려 들어가는 필름을 지켜보거나 창에 비치는 영화를 보는 일이 썩 근사했다. 창에 맺힌 화면은 수면에 비친 풍경처럼 흐리고 번져 알아볼 수 없었다. 전구의 불빛에 의지해 영사실을 돌아보다 지치면 작은 창 너머로 관객들의 영화를 훔쳐보았다. 뒤를 돌아보는 이가 없어서 그들의 영화를 훔치는 것은 자유로웠다. 영사기사는 가장 뒤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이었고, 가장 늦게 영화관을 나서는 사람이었다. 



텅 빈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누군가의 삶에 몰래 초대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개입하거나 말을 걸 수는 없지만 엿보는 것만은 허락된 사관처럼. 혹은 누군가의 주마등을 대신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흑색의 상영관에서 빛나는 것은 오로지 스크린뿐이었고, 빛을 뿜어내는 만큼 배우들의 삶은 밝아 보였다. 그는 스크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존재였으나 훔쳐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스크린에서 밝게 빛날 기회가 있었대도 상영관에서 훔쳐보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주목받지 않는 삶을 살려고 영사기사가 되었으니까. 그는 어둠의 밀도가 적당한 공간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영사실은 건물 밖으로 난 창이 없는 까닭에 밀봉된 것 같았다. 점멸하는 수십여 개의 신호들과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기계의 소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불을 끄면 점멸하는 신호들이 별 같았다. 노란색의 별과 붉은 색의 위험 신호. 별과 별과 별이 아닌 것을 구분하느라 줄곧 기기를 둘러보았다. 별이 붉게 타버리지 않길 바라는 게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청소를 게을리하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먼지들이 뭉쳐 굴러다녔다. 먼지 덩어리는 사막을 구르는 회전초를 연상시켰고, 보고 있노라면 사막에 홀로 떨어진 조난자 같았다. 사박사박.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는 쓸쓸히 걸었다. 그곳은 너무 고독해서 생각이 많아지는 공간이었다. 거기서 그는 몇 번이고 등대지기를 떠올렸다. 바다의 모서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그는 한 번도 등대지기를 본 일이 없었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등대를 발견한 것은 몇 번 있었지만 그게 어느 바다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등대에 낙서를 하거나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념비나 풍경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등대지기를 마주치더라도 알아볼 수 없으니, 등대지기는 그들의 세상에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평생 엇갈려서 살아가느라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존재. 그게 등대지기와 영사기사의 공통점이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밤이면 등대지기는 무엇을 할까. 달. 별. 구름. 바다. 수평선. 바닷가에는 추억이 될 것들이 많지만 등대지기라면 창에 비친 자신을 보는 일도 있지 않을까. 검게 일렁이는 바다와 창에 비친 자신이 겹쳐 보이면 그것만큼 고독하고 아름다운 게 또 어디 있을까. 그는 창에 비친 자신과 어두운 상영관을 겹쳐 보다가 영사실의 문을 잠갔다. 바깥은 어두웠고 노랗고 반짝이는 별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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