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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팝업플레이 서울 Jan 21. 2024

[생각]'안전'하려면'위험'이 무엇인지 경험해야 한다.

그 안에서 플레이워커(Playworker)는 어떻게 보호받아야 할까?

[플레이워크의 태도- 이론- 테크닉]


어린이가 하고 싶은 자신의 어젠다와 호기심이 존재한다. 그러한 태도로 어린이의 놀이 환경을 지원한다.

어린이가 스스로의 위험(Risk)을 인지하고 있을 때는 어린이를 믿고 그의 놀이 사이클을 멀리서 관찰하며 그의 안전을 살핀다.  어린이가 그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 판단될 때에는 즉각적인 개입보다는 스스로가 위험을 인지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게 질문과 제안을 해 본다. 그리고 어린이의 행동을 다시 관찰한다.


하지만 그 위험에 어린이에게 주는 이익이 없다 판단되었을 때는 즉각 그 위해 요인(Hazard)을 제거시킨다. 이 부분은 플레이워커의 경험도가 많이 작용하는 부분이기도 해서 이러한 상황이 판단하기 어려울때는 플레이워커 팀내에 사전- 운영중- 사후에 자신의 플레이워크를 피드백 받고 함께 더 좋은 방법을 필수적으로 논의하여야 한다. 또한 놀이판이 일어나고 있는 곳의 문화, 어린이의 특성, 보호자와의 관계, 날씨와 현장, 놀이 공간의 노면, 놀이 시설물 등 눈에 보이는 것 또는 보이지 않는 것 등이 연결되어 있어서 사전에 그리고 놀이 현장에서 세심하게 상황을 파악한다.


대부분 자신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이는 이러한 불확실성이 가득한 자연 현장에서 놀아본 경험이 아주 적고 갖춰 있는 환경에서만 활동했던 어린이이다. 요즘은 더군다나 자신의 신체 능력이나 활동 가동범위도 어린이 스스로가 모르는 상황이 빈번하게 펼쳐진다. 아동의 놀이 사이클을 계속 보며 근접이동하거나 또는 원격 주시하며 그들의 안전한 상황을 그들이 최대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지만 가끔 그 상황을 보고 있는 보호자 또는 이해 관계자 또는 플레이워커 연습생의 불안도까지 낮춰주기에는 나 스스로가 역부족이긴 한다.


어린이를 믿지만 어린이 또한 이러한 위험이 처음이기에, 우리 모두 세상을 살며 예쁜 유리병이나 수족관에서 살아가는 건 아니기에, 좀 다쳐도 먼지 털고 일어나고 서로 반창고 붙여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자 하기에는 너탓이라고 하면 더 편한 놀이 서비스가 가득한 시스템 안에서만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현장에서 수없이 관찰한 어린이가 이겨내는 힘을 믿지만,

함께하는 어른을 믿기에는 외롭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이 연구 실행은 우리 커뮤니티에 필요한 것인가? 적용 가능한 것인가?

매뉴얼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적용 가능한가? 는

개개인이 가진 삶의 가치관과 태도의 문제라

요즘 난 주저한다. 앞으로 나아가기에...



이상의 언어(연구)와 현장의 현실(실행)의 차이(Gap)가 크다.


'안전'하려면 어린이 스스로 경험한 '위험'이 무엇인지 책상에서 배운 지식이 아닌   

불확실한 환경에서 몸으로도 경험하고 채득해야 몸에 새겨진 실제 경험으로 자신의 '안전'을 가져갈 수 있다.

더군다나 자연 앞에서는 내가 다 할 수 있고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그 경험을 통해 수그리는(?) 도전 그리고 배려도 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면서 배워가는 어린이를 관찰한다.

이것은 실행 연구로도 현장에서도 내가 계속 보고 있는 사실(Fact) 이다. 


그래... 안다만 이거 어디 쉽겠나? 10년 전 현장보다 지금이 더 안 좋아졌다고 난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코로나 이후에는 체감상 더 안 좋아졌다. 어린이의 상황도 안 좋아졌다고 정성적으로 느끼지만 보호자가 맞딱 드린 상황도 어딘가에 홀로... 벼랑 끝에 서 계시는 느낌이다.


건강한 개인주의는 사라져 간지는 오래고, 공동체 문화는 뭐 어디서 찾을 수 있겠나?

논다는 건 혼자 놀기도 하지만 같이 놀게 되는 게 인간의 기본 속성이고 서로 단맛 쓴맛 보는 게 공동체에서 겪게 되는 참 별일 별일들이다.  우리 요즘 커뮤니티 커뮤니티~ 하는데 머리로 아는 커뮤니티이지 않을까도 싶다. 커뮤니티도 서비스화 돼 가는 마당에 말이다.

( 나 조차도 뭔가 참 부자연스럽지만, 그 서비스 문화에 편함을 느끼더라.)  


보호자 또한 이러한 위험한 놀이판을 원하지만 보호자 또한 흙을 온몸에 묻히며 위험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놀이본이가 드물다. 세대의 변화다. 


이런 놀이판에서 처음 놀아본 어린이나 무섭도록 적응하지 이걸 보고 있는 보호자 또는 이해관계자 

그리고 만들어 가는 어른의 머리에서는 지지하지만 맘 속에서는 온전히 지지하기 어렵다.


혹시나 다치면 어떡하지? 차가운 물에 감기 걸리면 어쩌나? 혹시 나의 어린이가 외로이 혼자 노는 건 맘 아픈데, 벌레 알레르기가 있는데 어떡하지?

또는 내가 플레이워커라면, 아 이렇게 위험을 허용해도 되나? 혹 나에게 아동을 잘 보지 않았다고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등등

보호자는 어린이가 참여하고 있는데도 함께 그 문제를 풀어가보자 보다는 서비스를 받고 있다 생각하는 입장으로 존재하고, 그 판을 만드는 플레이워커조차도 어린이를 대변하기보다는 보호자의 니즈를 맞춰주는 것에 이래저래 신경을 곤두서며 존재하기도 한다.


그게 어디 그 보호자의 문제 일까?  그게 어디 플레이워커의 문제 일까?

플레이워커라고 괜찮을 수만은 없지? 우리를 보호해 주는 장치도 없는데...


군집을 이루어 가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게 인간이라고 하지만 요즘 굳이 공동체가 없어도 그 빈틈을 해결해 주는 서비스도 많고 그것을 감정 소비하지 않고 맞춰갈 필요 없이 돈으로 해결하면 더 간편한 것들이 많다.

그야말로 간편하니까. 그리고 눈에 더 잘 보이게끔 마케팅도 해주는데 피할 도리가 없다.

계속되는 선택이 편해지고 습관을 만든다고 엄청난 내 취향과 고집이 아닌 이상 그 속에서 우리는 모르게 살아간다. 모르게 모르게.


함께 우리의 아동을 위해 무언가 지원해 보자고 그러한 경험이 없는, 그리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문화는 사라져 가는데... 내가 하는 이 연구와 실행은 현장에 어린이를 만나면 만날 수록 너무 필요하다.

없으면 어린이가 마음껏 숨이나 쉴까? 내가 뭔가가 필요하다고 소리 내어 말이나 할까? 같이하자!라고 말할게 몇 개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시스템에 맞춰 살거나 또는 자유도가 너무 적어서 이 놀이판은 집 옆에 하나 정도는 바로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인데,,,

과연 그 위험을 의연하게 감당해 낼 '우리'는 있을까 싶다.


현장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은 함께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우리' 라기보다는 플레이워커 '개인'으로 존재하게 된다. 어린이 놀 권리나 이러한 놀이판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에 깊이 공감하기에 플레이워커의 존재는 매우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과연 그 위험을 함께 감당할 수 있다고 하는 이해관계자나 보호자가 몇이나 될까?


나는 과연 이 필요한 연구와 실행이 당신도 해보라고 다른 플레이워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필요하니 항상 당당했지만 방향성이 이게 맞다는 걸 현장에서 경험하며 있었으니 나아갔지만, 세상이 요즘 이러하니 그 어려움도 당당하게 맞서자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요즘 주저 한다.


이 필요한 일을 어떻게 나도 너도 우리도 상처받지 않고 당연히 이래야 하는 것인 어린이가 살아가 세상이어야 할텐데, 원래 그 세상은 없었던 건데 나 혼자 이러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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