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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들 Feb 29. 2020

김성중, <국경시장>편  「1」

만월 아래에서 슬픔을 팔아버렸을 때의 일



로나의 팔목에는 세 줄의 ‘절망의 눈금’이 있다. 사라지려던 흔적이다. 또는 사라지지 않으려던. 만월 아래로 펼쳐진 ‘국경시장’에서 로나의 절망은 화폐가 된다.



<로나는 슬픈 삶을, 주코는 지루한 삶을 팔기 위해 자주 환전소를 드나들었다.>          



삶이라는 결론을 위해 사사롭다고 느껴지는 과정들을 반복한다. 어떤 일들은 아주 사소하면서도 너무 중대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말하자면, 눈을 뜨고, 음식을 먹고, 배설하고, 수면을 취하는 일이 그렇다. 인생이 너무 지루하고 슬플 때는, 그 일들이 나를 더 지루하고 슬프게 한다. 부엌 선반에서 210g짜리 즉석밥을 꺼내 뚜껑 껍질을 절반 뜯는다. 130g짜리는 양이 적어서 바꿔 사먹기 시작한 제품이다. 일정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주황색 불빛을 응시하다가, 돌연 치가 떨린다. 너무도 무료하고 슬프게 그러면서 명백하게 살아있다는 감각이 불쑥 튀어오른다. 띵-! 하는 소리 뒤로 고요해진 전자레인지 안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삶을 쉬고 싶은 날이 있다. 필수적이고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삶의 과정으로부터 분리된 다음 차라리 지루함이나 슬픔을 만들고 소모하는 데만 시간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줌을 누고 싶어서 몸을 일으키고, 허기를 느끼며 부엌을 뒤지고, 붐비는 지하철에 오르고, 직장 동료에게 인사를 건네고, 상황에 걸맞은 표정을 짓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동떨어지는 것이다. 불 꺼진 방처럼 까맣게 네모나게 비어서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하면 지루하거나 슬픈 마음은 오히려 견딜만한 일처럼 느껴진다.


삶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싶은 마음, 그게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쪽의 것인지 더 열렬히 살고 싶은 쪽의 것인지 잘 모른다. 어느 쪽도 아닌, 둘의 간격이 몹시 좁아질 때 그 틈에서 생겨나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녀는 모든 기억을 전소시킨 순간에 이런 부탁을 남겼다. 로나는 더 이상 로나가 아니었다. 우아한 독신 귀족 같은 여자는 이제 사라졌다. 그녀는 슬픈 기억을 모두 버린 후에도 세상으로 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로나는 더 이상 손목을 긋지 않고, 세계를 여행한다. ‘장기 여행자답게 무엇에나 능숙’한 그는, 어디에서든 느긋하게 걷고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어 내고 미소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전 세계를 떠도는 것이 사실은 슬프다’고 고백한다. 눈금을 새기는 대신 여행했지만, 떠나는 일은 빠르게 끝나버리고 그 뒤로는 반드시 어딘가에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일까. 땅을 디디고 나면, ‘멀고 알 수 없는 그곳’은 사라진다. 아름답고 이국적이지만 동시에 선명하게 일상적인 세계를 마주한다. 내달아온 새 세계에서 열 걸음을 걸으면 슬픔이 차올랐을 것이다. 지난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점성이 좋은 로나의 슬픔, 그것은 언제나 로나와 함께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는 필사의 의지보다는, 예사롭게 뒤돌아 거기에 있는 것과 눈 마주치는 대담함을 원한다. 초라하거나, 서슬이 퍼렇거나, 깜깜한 각자의 장면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나만 알고 싶은 이야기, 실은 나조차도 모르고 싶은 이야기가 우리 각자에게 있다. 잠시조차 멈추지 않는 삶을, 그래도 사느라 그어온 ‘절망의 눈금’들이다. 납득이나 용서가 어려울 때면 그것들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그 화염이 어디까지 번져갈는지는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답할 자신 없는 질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과연, 지루하게도 슬펐던 기억을 모두 지우고 나면 그 자리를 기쁨과 생기가 알맞게 채우는 것일까.



<다음 만월에 날 만나러 와줘.>          



로나의 내면은 슬픔의 차지였다. 로나의 많은 기억이 슬픔으로 치환되었다가, 자기애(自己愛)와 우아함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슬픔에 관한 기억을 팔아치워버렸을 때, ‘우아한 독신 귀족 같은 여자’의 영혼 역시 함께 ‘전소’되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삶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한 모든 과정들에 지쳤고, 살아있다는 감각을 잊어버리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것이 로나에게 새겨진 네 번째 ‘절망의 눈금’이며 최후의 ‘절망의 눈금’이다. 로나는 텅 비어버렸고, 더 이상 슬프지도 우아하지도 않게 국경시장에 붙박인 채 있을 것이다. 그의 유랑은 끝났다.

슬픔이 스러지고 난 자리에는 서둘러 잊힌 약속만이 남아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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