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 들 Jan 08. 2023

용이와 한들

춤 끝까지 춰! 아빠는 괜찮아


한들의 방엔 화장대가 없다. 몇 개 없는 화장품을 담기 위해서는 작은 수납박스 하나 정도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청소년기의 한들에게는 화장대가 분명 필요했는데 책상밖에 없어서 몰래 책상을 화장대로 쓰곤 했다. 아이브로우나 마스카라는 다루기 어려웠으므로 아이라이너와 틴트에 주력한 화장을 했다. 소풍처럼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뺨에는 치크를 눈 밑에는 글리터를 발랐다. 화장을 해도 꾸짖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소풍을 더욱 기다렸다. 그 시절 한들의 눈에 예뻐 보이며 그 외의 사람들에게 지적을 듣는 물건은 그것 말고도 많았다. 어깨끈이 없는 튜브탑 스타일의 민소매와 9cm의 굽을 가진 하이힐, 따로 구매해 교복 셔츠 위에 맸던 타 학교 넥타이 같은 것들이 그랬다. 어떤 교사는 한들이를 ‘노는 애’로 생각했고, 어떤 ‘노는 애’는 한들이를 ‘나대는 애’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들은 놀지도 나대지도 못했지만 어느 틈에 그런 애가 되기도 했다.

 

하얗고 반짝이는 어린 한들의 얼굴을 싫어하는 어른들 중 가장 중요한 어른은 그의 아빠, 용이였다. 용이는 한들에게 있어 누구보다 강력한 권위자였다. 한들은 용이에게서 태어났고, 제일 길고 깊게 한들이라는 존재에 관해 논해온 사람 또한 용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용이의 말과 표정은 한들의 말과 표정을 결정했다. 용이에게는 한들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들 힘이 있었다. 그런데 용이는 그것을 잘 몰랐다. 한들이 용이의 말을 전혀 안 듣는 딸이었기 때문이다. 용이가 ‘손톱이 왜 그래? 메니큐어 지워!’라고 말하면 한들은 그 말을 잠깐만 듣는 척 하고 실은 뒤돌아 콧방귀를 꼈다. 그러나 메니큐어 칠해진 손톱을 보며 눈썹을 치세우는 용이의 얼굴이 한들을 울적하게 했다. 한들은 용이 몰래 손톱을 알록달록 칠하고 등이 훤히 파인 옷을 입고 굽 높은 구두를 신으면서 점점 굳게 생각했다. 용이와는 결코 친해질 수 없을 거라고.

 

둘이서 친해질 방법이 한 가지 더 있긴 있었다. 그건 한들이가 조금 더 학생답게 배움에 힘쓰는 일이었다. 한들이가 공부를 잘 했던 적은 중학교 1학년, 전교에서 8등을 했던 딱 그 한 학기뿐이었다. 그 이후 한들이는 공부를 이 편에 두고 저 편으로 전력 질주하는 청소년으로 살아갔다. 이유는 메니큐어 칠한 손톱을 나무라는 용이가 미웠기 때문이다. 용이가 화장을 하지 않은 한들이만큼이나 공부를 잘 하는 한들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한들은 알고 있었다. 한들이 만화를 그리거나 인터넷소설을 쓸 때마다 용이는 걱정스러워했다. 한들이는 용이의 입에서 ‘만화도 그리고 인터넷소설도 쓰고 공부도 해’라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만화도 그리고 인터넷소설도 쓰고 공부도 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용이는 끝내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한들이는 홧김에 공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시험시간에는 OMR카드의 모든 문항을 한 번호로 체킹했다. 수업시간에는 자거나 놀았다. 그런 행동이 스스로에게 해롭다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은 한들이가 왜 그런 행패를 부리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한들이는 누구도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한들이와 용이는 공부로 친해지기는커녕 그것 때문에 더 서먹해졌다.

 

용이는 걱정하는 만큼 계획하는 사람이다. 2시간짜리 기차여행을 떠날 때에도 한 달 전에 열차 티켓과 숙소를 예약하고, 일주일 전에는 10분의 자투리 시간까지 포함해 여행 코스를 짠다. 열차 출발 30분 전까지 승강장에 동행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사람 없이 여행을 하는 경우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둔다. 어떤 일이든지 최악의 상황을 내다보고 대비하고 싶어 한다. 그런 용이에게 딸의 미래란 너무나 예측불가한 것 중 하나였다. 최악을 예상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한다 쳐도 그것의 대비책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용이는 한들이가 공부를 잘 하기를 바랐다. 공부란 용이가 아는 가장 예외 적은 인생 공략법 중 하나였다. 용이는 뛰어나게 공부함으로써 삶의 무수한 곡절을 넘었고, 그렇게 쌓인 해박함이 난관에 맞닥뜨린 용이를 또 몇 번 버티게 했다. 용이는 미래의 한들이가 실패할까봐, 좌절할까봐, 낙오자가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용이의 전전긍긍에도 불구하고 한들이는 미래로 나아가며 실패했고 좌절했고 낙오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동시에 건재했다. 용이의 겁박과 사랑을 받고 또 그것들과 싸우며 어떻게든 사회인이 된 한들이는 학원강사로 일했다. 어느 날 한들이가 퇴사를 하고 제주도로 내려간다고 했을 때 용이는 말리지 않았다. 한들이 제주에서 쓴 원고를 모아 독립출판물을 냈을 적에 한 번에 가장 많은 권수를 구매한 사람은 용이였다. 용이는 더 이상 한들이에게 인생에 대한 두려움을 내색 않기로 한 것 같았다.


<미스 리틀 선샤인>은, 9단계로 이루어진 ‘실패를 거부한다’ 이론을 펼치며 열강하는 리차드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강의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화면은 리차드 앞에 앉은 채 열 명도 되지 않는 청중들에게 돌아간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실패를 거부하는 리차드에게는 올리브라는 딸이 있다. 올리브는 동그란 안경을 썼고 아이스크림을 사랑하고 배가 볼록하게 불러있다. 볼이 발간 이 아이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손을 고상하게 흔드는 법을 연습한다. 어린이 미인대회인 ‘미스 리틀 선샤인’ 출전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인 대회를 앞두고 리차드는 올리브에게 묻는다.


“이긴다는 확신이 없다면 참가하는 의미가 없어. 이길 거니?”


이것은 올리브를 향한 리차드식 지지이다. 이때, 올리브는 잠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이어 힘차게 “네!”라고 응답한다.



그런데 대회 직전날 밤의 올리브는 울음을 터트린다. 낙오자가 될까봐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올리브는 겁나는 만큼 할아버지를 여러 번 부른다.


“아빠는 낙오자를 싫어하잖아요.”


올리브가 그렇게 말했을 때, 할아버지는 리차드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넌 노력했잖아. 그럼 낙오자가 아냐. 내일 재미있을 것 같지?”


올리브는 하마터면 두려움 때문에 깜빡 잊을 뻔했던 설렘을 할아버지 덕에 되찾고 눈가를 비벼 닦는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예견이 맞아떨어진다. 올리브가 펼치는 무대는 유일무이하다. 기호 25번인 올리브는 24번까지의 어린이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후보자이다. 눈두덩이와 입술을 진하게 칠하지도 않고, 머리카락을 매끈하게 물결치도록 매만지지도 않고, 프릴이 달린 비키니 수영복도 입지 않았다. X자 워킹을 선보이지도, 서커스 단원 같은 곡예를 넘지도 않는다. 대신에 올리브는 마술사들이 쓸 법한 모자를 쓰고 빨간 헤어밴드를 둘렀다. 헤어밴드와 같은 색의 넥타이를 맨 올리브가 관객 앞에 나서자 Mc Hammer의 <U Can't Touch This>가 흘러나온다. 할아버지가 고른 안무곡에 맞춰 엉뚱한 춤을 추는 올리브. 원판 던지듯 모자를 날려버리고, 빙글빙글 돌며 엉덩이를 두드리고, 네 발로 바닥을 걸으며 사자 흉내를 낸다. 몇몇 관객이 야유하며 자리를 뜨고, 운영자는 사회자로 하여금 올리브를 무대 아래로 끌어내리려 한다. 꽁무니를 빼며 내달리는 올리브가 사회자에게 붙잡히기 직전, 한 관객이 무대로 난입한다.

 

사회자를 향해 뛰어든 사람은 바로 리차드이다. 이제 온 운영진이 리차드에게 달라붙는다. 움직임을 덜컥 멈춘 올리브가 목석처럼 무대 변두리에 섰을 때 리차드는 소리친다.


“춤 끝까지 춰! 아빠는 괜찮아.”


올리브가 다시 양팔을 머리 뒤로 깍지 끼고 배를 튕기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운영자는 리차드를 등 떠밀며 무대를 멈추게 하라고 경고한다. 리차드는, 열성으로 개구리처럼 온몸을 움직이는 올리브 주변을 서성이며 난처한 듯 귓불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더니 귀를 붙잡은 채로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점점 더 빠르게 고개를 까딱거리고 얼마 안 가 몸통을 흔들고 마침내는 올리브와 똑같은 몸짓으로 춤춘다. 경악한 운영진의 입이 다물어지기도 전에 나머지 가족들이 전부 무대 위로 뛰쳐오른다. 올리브의 삼촌과 오빠, 엄마까지 다 같이 무대 위에서 한 팀의 개구리가 된다.



올리브의 우승은 진즉에 물 건너갔고, 남은 것은 엉망진창으로 몸을 흔들며 손을 맞잡는 그들뿐이다. 이 장면을 보려고 <미스 리틀 선샤인>의 관객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무대가 이어질 때 한들은 참을 수 없는 폭소를 터트리면서 웃음 사이마다 매워지는 코끝을 문지른다. 올리브와 똑같은 춤을 추는 동안 리차드는 ‘실패를 거부한다’ 프로그램을 잊어버렸을까. 우스꽝스럽고 경쾌한 리차드의 움직임을 보면서 한들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독립 서점 몇 곳에 책을 입고한 뒤로 별 소득 없는 글쓰기를 이어가던 한들에게 용이가 어떤 말을 건네는 모습이다.


“하루하루를 성의껏 살아야 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것도 맞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오늘을 살 수 있으니까 그렇지.”


그때 한들은, 살면서 들었던 그 비슷한 말들 중에 용이의 말이 가장 힘세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독서관>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인 <요일작가> 시즌2에서 무료 연재 하였던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밤의 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