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 노트
언어적 상담은 과연 내담자들의 어려움을 다루기 충분할까요? 상담자의 내공, 내담자와 상담자의 독특한 상호작용, 상담실 밖에서의 내담자 경험, 이 모든 게 상담 성과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기에 더해서 최근 상담자와 연구자들은 상담이 이루어지는 '언어적' 상호작용 자체에 한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인지적인 처리를 거쳐야 하는 언어적인 상호작용은 언어 이전의 감각, 느낌, 기억을 비롯한 경험을 다루고 자유로워지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다양한 상담 이론과 접근에서 점차 심상(Imagery)과 신체감각(Sensorimotor)을 강조하고 있어요.
먼저 전통적으로 활용되었지만 기법 수준으로 다뤄졌던 심상(Imagery)입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나 정서중심 심리치료에서는 주요한 치료적 통로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인지행동치료에서도 초기에 벡 Beck이 심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서 심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인지행동치료 원리와 기법>, <심상을 활용한 인지치료> 등의 책을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심상 재구성(imagery rescripting)이라는 이름으로 트라우마 기억을 처리하고 통합하게 도와주는 개입들이 많이 활용되고 있죠. 정서경험이 활성화된 상태에서 인지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연구결과를 떠올려보면, 심상을 활용하여 '기억에 매여있고 지금도 재현되는 정서'를 재경험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 정서적, 인지적, 행동적 변화에 중요한 축이 될 수 있어요.
요즘 심상을 상담에서 활용하며 느꼈던 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아요. 첫째, 불안정 애착으로 인해 수치심을 주로 경험하거나 감정 접촉이 어려운 내담자들과의 상담이 겉도는 느낌이 들 때 활용해 볼 수 있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에 가려진 분노, 억울함, 무력감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에 닿으면서 내담자들이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는 기회가 됩니다. 이때 강렬한 유년기 경험을 먼저 섣불리 다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상담자가 느끼기에 그 기억이 핵심적이라고 느끼더라도, 내담자가 준비되지 않으면 들어가지지 않고 효과적이기도 않기 때문이죠. 차라리 비교적 최근에 경험했던 감정이 재현되는 강렬한 기억부터 작업해보아도 좋습니다. 내담자가 최근에 괴로웠고 여전히 힘들기 때문에 동기도 높고 생생한 작업이 되거든요. 심상 작업을 통해 내담자는 접촉되지 않았던 감정 혹은 수치심에 가려졌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덮어두고 회피했던 기억을 용기 내어 들여다보니, 내가 그때 생각보다 더 많이 힘들었구나 느끼며 연민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그걸 경험하고 있는 그때의 나를 비로소 안쓰럽고 안타까워하며 위로해 줄 수 있고, 그럼으로써 감정적으로 가벼워지면서도 지금의 나에게는 위로해 줄 힘이 있구나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이 다음부터는 심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더라도 과거 경험을 탐색할 용기와 동기를 가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둘째,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서 안전하게 작업하고 디브리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상 작업의 특성상 심상을 구체화하고, 필요하다면 안전지대를 만들고 중간 대상을 구체화하며, 심상으로 들어가 재구성하는 작업들을 마치려면, 3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다룰 수 없다면 상담 시간을 연장해서 사용가능한지 상담자가 빠르게 판단해야 합니다. 감정을 생생하고 강렬하게 경험하기 때문에 내담자가 용기를 냈더라도 굉장히 도전적이고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심상을 시작할 때에는 '지금부터 눈을 감고 이야기해 볼 수 있으시겠냐, 준비된 만큼만 이야기하셔도 된다. 어렵다면 지금 하지 않아도 좋다, 어려운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된다.'라는 식으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작업하도록 하고, 심상을 작업하면서도 정서가 압도적이라면 그라운딩이나 중간 대상을 활용하고 너무 강렬하다면 기억을 선택적으로 재경험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심상 재구성을 마치고 난 후입니다. 상담자는 지금 느끼는 감정과 신체 경험은 어떠한지 충분히 다루고 안전함을 느끼면서 떠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심상 작업인 셈이죠. 이 부분은 심상뿐 아니라 언어적 상호작용에서도 중요한데요.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을 상담에서 처음 풀어놓게 되면 밀려오는 감정에 압도되고 부적절감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당시에는 후련할지 몰라도 상담실을 떠나 그 기억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내담자는 부담스러워 상담실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어요. 감정의 파도가 높은 심상 작업에서는 특히 민감하게 다뤄져야합니다.
셋째, 과거의 심상 재구성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부정적 심상을 대체할 긍정적 심상을 구성하는 작업도 심상의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미래에 대한 부정적 심상이 활성화되면서 막연한 불안이 반복될 때, 상담자는 함께 무기력해질 수 있습니다. 내담자가 그 심상과 생각이 유용하지 않다는 걸 알더라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고, 상담자의 인지적인 개입이나 정서적 개입이 힘을 잃게 될 때가 있거든요. 그러다보면 직접적인 개입보다 과거 경험으로 돌아가 간접적으로 다루거나 불안을 조절할 수 있는 마음챙김 기술을 연습하게되죠. 이때 긍정적인 심상을 새롭게 형성하는 작업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Pedesky와 Mooney (2005)는 오래된 체계를 해체하고 변환하는 것보다 새로운 체계를 발달시키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심상을 구체적으로 창조해보며 머물러보는 작업이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어요. 조망이 좁아져 있는 상태에서는 부정적 심상만이 전부라고 느끼면서 다른 가능성을 품지 못하고 있을 수 있거든요.
최근에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신체기반 심리치료의 이론적 기반은 <몸은 기억한다>, <다미주이론> 등의 책을, 실제적인 치료적 접근은 <트라우마와 몸>, <감각운동 심치치료> 같은 책을 참고해 볼 수 있어요. 수용전념치료를 비롯한 심리치료를 오랫동안 해오신 민병배 선생님께서도, 신체감각을 포함하는 이론적 접근을 공부하시면서 '일찍 알았더라면 이전에 한계가 있었던 내담자들을 더 도와줄 수 있었겠다'라고 회고하시더라고요. 선생님께서 공부한 신체기반 치료 역시 수용전념치료에 신체 경험을 포함시켜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어요. 첫째, 심리적 어려움이 클 때에는 신체적인 증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신체적인 것을 경험에 포함해라. 둘째, 신체 경험을 포함하여 수용과 전념을 도모하되, 충분한 안정화를 기반으로 점차 수용과 전념 단계를 밟아라. 이 영역에 대해서는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고 적용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