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 노트
1. 있는 그대로 느끼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 이전의 경험들이 '솔직하게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짐작하게 한다. 누군가는 참고 피하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들에 귀 기울이기 어렵고, 누군가는 상대방으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화라는 방식으로만 감정을 느끼고 처리한다. 그때 무력함, 좌절감을 감당하는 방법은 더 이상 표현하기보다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에게 의존하는 방법. 표현하면 좌절되고 무기력해질 것이므로. 과도한 통제가 있었다면, 통제를 거부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면서 알아서 잘하니까 간섭하지마, 라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그때 무력하게 좌절된 마음을 훑어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구나, 지금 내가 답답함을 느끼는 지점은 사실 과거의 거기에서 왔구나, 알아차리는 순간.
2. 조금 더 깊은 패턴을 이해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결국 아동청소년기 내지는 중요한 시기를 훑어야 하는구나. 그 맥락을 펼쳐줘야 반복되는 감정과 관계 패턴이 넓은 조망에서 이해되기 시작하고, 그때 그 상황에서는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알아주고 애도하며, 지금은 그때와 같지 않고 지금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계속 비춰주면, 비로소 내담자는 지금 여기에서 과거의 감정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다. 너무 빠르지 않게 적어도 10회기는 넘어가야 가능한 해석들.
3. 우리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지 못할 거라는 기대 때문에 물러나기도 하지만, 자신이 베풀기만 하는 역의존 관계를 되풀이하기도 한다. 애쓰면서 손해 보는 관계를 반복한다. 외로움, 공허함 때문에 누군가 옆에 있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는 건 스스로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수 있다. 홀로 온전히 괜찮다는 감각이 충분치 않아서 혼자로도 괜찮을 수 있는 노력보다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관계에 매달리며 노력한다. 타인을 통해 나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의 맹점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나와 언제나 같은 마음일 수 없으며, 심지어 언제든 떠나갈 수 있다. 상담에서는 관계를 훑으면서도, 스스로 통제감과 유능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나를 돌보고 관리하는 작업을 한다.
4. 회피라는 대처방식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이면의 감정과 기제를 훑고 나면, 예를 들어 수치심이라든지 분노라든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회피 이면을 보기.
5. '제 상황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계신 거 같아요'라는 긴장. 상담자가 너무 빨랐다. 내담자의 상황을 해결해 주고 싶은 상담자의 욕구. 내담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두발은 모두 밖에 꺼내놓고 하기 쉬운 말을 하고 있었다. 환경을 바꿀 수 없어서 무력하고 공허하다고 말하는 내담자로부터 나마저 무기력해지지 않기 위해서, 무기력해지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나의 욕구.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 이전에, 나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거리 두면서, 무력감과 공허함을 부인하거나 설득하기보다는, 이 사람이 이렇게 막막함을 느끼고 있겠구나 함께 느끼면서도, 그것에 함께 발맞춰 춤추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버티고 있구나, 그럼에도 책임감 있게 모두 해내려 하고 있구나,라는 걸 비춰주는 것. 무력한 마음에 한줄기 훈풍을 불어주는 것. 더 솔직해지자면, 사실은 내가 무기력함을 견디기 힘들어해서,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머물기보다는 바꾸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내담자의 무기력도 그대로 담아주지 못하고 튕겨내고 있었구나.
6. '이전의 상담시간들과 다르게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시는 것처럼 느껴져요'라는 긴장. 역시 상담자가 너무 빨랐다. 역시 두발을 밖으로 꺼내놓고 내담자의 입장보다 아내의 입장에서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면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추정, 그리고 미래의 내담자가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지금 아내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겨워서, 보고 싶지 않은 그 마음에 대해서 훑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 긴장 속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솔직하게 표현하고, 나의 긴장된 마음과 앞서간 마음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내담자로부터 또 한번 배운다.
7. 회사에 입사해서 기대하지 않았던 궂은 부서에 배치되어 박탈감을 느끼는 내담자. 여기에서도 상담자의 급한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not-knowing의 자세로 궁금해하며 맥락과 감정을 펼쳐보기보다는, 내가 먼저 판단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려 하지는 않는지. 그저 거울처럼 비춰주고 이면의 감정을 읽어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고 나면 내담자의 마음은 전투태세에서 말랑하고 연약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감정에 머무르며 풀려나가고, 옅어진 감정 속에서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지를 훑어보기 시작한다.
8. 우리가 함께 어려움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만으로는 변화는 어렵다, 10번 중에 1번 되는 경험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운 게 당연하다, 10번 중 1번이 오기 위해서 용기내서 해보면 좋겠다. 그럼 10번 중에 3-4번도 될 것이므로.
9. 경쟁심, 안도감, 죄책감, 감정들은 너무나 인간적이잖아요. 왜 그 인간적인 감정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까요. 느끼면 좀 어때요. 인간이라면 이기적인데 왜 이기적인 게 그렇게 싫을까요. 00님은 신이 아닌데 왜 그렇게 완벽해야 할까요 그게 가능한가요. 그런 감정 생각이 들어도 괜찮아요. 그것에 휩쓸려서 선택하는 일이 반복되지만 않는다면요. 감정과 생각이 곧 나인 것은 아니에요. 떠오르고 또 사라지는 내 안에 무엇이에요. -> 사실은 이것 역시 설명이었구나.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맥락에 대해 궁금해하며 펼쳐 보일 것.
10. 감정에 쓸모 무쓸모가 있을까요. 그건 그냥 거기에 있어요. 무쓸모하다고 해서 없앨수도 없거니와 무쓸모하지도 않거든요. 비효율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느끼지 않으면 없어지는 게 사실인가요, 다른 감정으로 자꾸 드러나고 있어요, 우울함 억울함 외로움이 화로만 느껴지잖아요, 화로 표현하면 즉각적인 반응이 있어서 시원할지 몰라도, 결국 다투면서 서로의 감정은 상하고 시간은 흐르고, 그건 효율적인가요. 감정은 그냥 거기에 있어요.
* 요즘 상담하며 지칠 때 이정표가 되는 말
"지금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그니까 알면 알수록 더 몰라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져서 재밌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음악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정말 미궁의 세계에 빠지는 게 있어요. 어렸을 때는 그게 좋았거든요. 18-19살때는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발전할 수 있는 한계가 많구나라고 했는데. 점점 나이가 들수록 더 노력을 해야 하더라고요. 음악이 좋은 게 그런 거 같아요. 끝이 없고 계속하면 할수록 더 모르고 그러니까 재밌는 거죠."
- 김선욱 2022.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