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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크림빵 Oct 08. 2023

기업상담에서 무엇을 경험했을까? :1년차 회고

심리학자로 살아남기

  어느새 제가 좋아하는 서늘한 가을날입니다. 여유로운 연구원 생활을 하다가 기업에서 근무하면서 하루하루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동안 대학원과 병원에서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다른 모양으로 재정렬하면서 펼쳐내는 과정이 피로하지만 또 재미있어서 살아있음을 느꼈어요.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새로움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변화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경험했어요. 오늘은 기업상담사로 생활한 1년차를 회고해보려 해요.


BGM: Víkingur Ólafsson – Bach: Organ Sonata No. 4, BWV 528: II. Andante [Adagio] (Transcr. Stradal)



개인상담


  나이부터 직급 직군 학력까지 다양한 배경을 지닌 내담자들을, 조직 내에서 만나면서, 상담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하게 됐어요.


  첫째, 상담자의 고객이 내담자와 조직 모두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웠어요. 그러니까 내담자 뿐만 아니라, 조직의 요구와 잠재적인 내담자가 있는 조직을 고려해야 하니까요. 내담자의 이익이 조직의 요구나 잠재적 내담자가 있는 조직과 상충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정답이 없고 여전히 서툴기에 앞으로도 고민은 계속되어야 할 것 같아요.


  둘째, 직무 매칭이나 조직 내 갈등 등의 현실적인 한계가 명확할 때 상담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답한 마음을 공감하고 반영하면서 점차 내담자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 이상으로, 예를 들면 해결중심 상담을 해야하는가. 이전 글에서 상담이 해줄 수 있는 한계를 의식적으로 구체화하고 구조화해야 한다고 썼지만, 내담자의 상황을 그려나가다 보면 같은 조직 구성원으로서 그 이상의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셋째, 내담자가 자기이해나 성격적 변화를 원하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두번째와 이어질 수 있는 주제인데, 내담자가 단지 이 상황을 견디거나 해결되기만을 바랄 때, 상담자는 더 큰 압력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통찰과 관계에 초점을 맞춘 상담 훈련을 받았다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태도로 상담을 이어가기가 쉬워요. 하지만 조직 내에서 이루어지는 상담은 내담자의 변화 동기가 크기보다는 조직 내외에서 겪는 어려움을 토로하고 해결하고 싶은 숙고 전단계에서 오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럴 때 상담자는 이 내담자에게 단지 동기강화면담을 하고 패턴을 비춰주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담자가 아직 준비가 안됐다'라고 말하는 건 상담자의 손쉬운 위안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는거죠. 쓰다 보니 오지랖(과도한 개입)과 손쉬운 위안(거리두기)은 미묘한 한 끗 차이라고 느껴집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같지 않고 새롭다는 게 상담의 즐거움이면서 또 지치게 하는 구석입니다.


  넷째, 낯선 배경과 성격 구조를 이해해나가는 경험이 필요하다. 대학원과 병원에서 상담을 하면서 경험한 내담자의 배경이 10-30대, 대학(원)생 이상이 많았어요. 기업에 와보니 남성 내담자의 수도 상당하고, 고졸부터 박사까지 다양한 학력의 배경을 지니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새로운 배경의 내담자와 상담을 구조화하고 개입을 하면서 벽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호기심 어린 공감적 질문도 바닥을 보이더라고요. 낯선 내담자에 대한 수퍼비전을 많이 받아야겠다 싶었고, <정신분석적 진단> 스터디를 하면서 여러 성격 구조에 대한 공부가 내담자를 이해하는 밑그림이 되겠구나 체감했어요.


심리교육 및 워크숍


  먼저, 기업에 와서 면담법이나 게이트키퍼 교육을 하고 영상을 제작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육을 진행했어요. 개인상담이 진하게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심리교육이나 프로그램 운영은 여러 사람들과 호흡하며 에너지를 받는 경험이었어요. 심리검사를 활용해서 부부 코칭이나 강점 기반 자기이해 프로그램을 하면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내담자(들)을 함께 살펴보고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힘들지만 즐거웠어요.  아마 대학원과 병원 시절에 집단상담이 재밌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상담센터 접근성 향상을 위해서 직접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운영해보기도 했어요.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면서 구성원의 수요를 알기 위해 설문지를 구성하고 분석해보며 새롭게 문제나 주제를 도출하는 순환도 보람이 있더라고요. 내년에는 어떤 프로그램을 해보면 재미있을까 고민해보기도 합니다.


소진관리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살짝 소진이 왔던 시기도 있었어요. 위기상담을 끌고 나갈 때와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상담에 집중하기 힘들 때였어요. 소진은 상담의 질에 바로 영향을 주기에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무력감을 느끼고 있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미리 여러 기반을 마련해놓는 게 중요하다 느꼈어요. 그 시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집단 수퍼비전과 회사/대학원 동기들과 함께한 북리딩이었어요. 제가 케이스 발표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상담자의 경험과 수퍼비전을 듣다 보니 가끔은 상담으로 초점이 돌아오기도 하고 의욕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리고 회사/대학원 동기들과 틈틈이 짬을 내서 북리딩을 하면서 각자의 상담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상담 밖에서는 운동이나 오케스트라 연습처럼 일단 하고나면 즐거운 스케줄을 만들어두는 게 도움이 됐어요.


어떤 책을 읽었나


  1년 동안 브런치가 이전보다 뜸해지긴 했지만 스터디, 북리딩, 혹은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왔어요. 먼저 강독 스터디를 들으면서, 애착과 심리치료, 정신분석적 진단 두 책을 읽었네요. 애착과 심리치료는 대상관계이론과 정신화와 같은 현대정신역동 상담과 마음챙김을 통합하는 과학적인 연구기반과 상담 실제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었어요. 해설해주는 선생님의 깊이에 감명받으면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아득해지기도 했네요. 정신분석적 진단 - 성격구조의 이해,  2판은 병원 수련시절에 시도했다가 성격장애별로 해설하는 파트가 읽히지 않아서 중도하차했었던 책입니다. 점점 바빠지면서 이번에도 후반부에는 집중하지 못했지만 성격장애별로 어떤 발달과정과 방어기제를 지니는지 구조에 대한 설명이나 정신증/경계선의 구분이 모든 성격구조에 있다는 구분이 새로웠습니다. 언젠가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회사 동기들과 북리딩을 통해서 해결중심 단기치료, 상담 및 심리치료 대인과정 접근을 읽었습니다. 해결중심 단기치료는 회사 동기들과 빠르게 읽었어요. 그야말로 주제별로 해결중심 관점의 개입들을 컴팩트하게 다루는 책입니다. 해결중심 상담이 단지 피상적인 개입이 아니라 내담자를 믿으며 그것을 질문과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해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다만 내담자 어려움의 깊이나 종류에 따라 선택적으로 활용해야할 것 같고요, 해결중심의 스킬 자체보다 해결중심이 품고 있는 관점을 이해하는게 중요할 거 같아요. 상담 및 심리치료 대인과정접근, 7판은 병원 수련에서 읽었던 6판의 개정판을 읽고 있어요. 다시 읽어도 새로운 게 느껴지는 금쪽같은 책이에요. 상담자가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직접적으로 개방적으로 인정하며 다뤄주는 게 이 책의 시원함이 아닐까 싶어요.


  대학원 동기들과는 정서와 작업하기 - 정신역동, 인지행동 그리고 정서중심 심리치료에서를 읽었습니다. 현대 심리치료의 주요한 3가지 관점에서 정서를 어떻게 비슷하게 보고 어떻게 다르게 보는지를 정리해볼 수 있어요. 비슷한 듯 다른 모양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즐겁습니다. 정신역동 부분에서는 번역이 난관이었고, 정서중심 부분에서는 이론 자체가 정교화되지 않은 건지 제가 잘 모르기 때문인지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개인적으로 정신역동과 인지행동에 마음이 많이 기울더군요! 지금은 카를 융, 기억 꿈 사상을 읽고 있어요, 한번 딱딱하고 직접적인 전공책 말고 다른 책을 읽어볼까, 이제는 융의 심오한 예술성을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선정했어요. 유년기 초반에 지루함을 견디면 점점 빨려 들어가더라고요. 앞으로가 기대돼요.


  혼자서 읽은 책은 한 명의 내담자, 네 명의 상담자와 기업상담입니다. 한 명의 내담자, 네 명의 상담자 - 다른 접근의 상담 사례 연구는 인지행동, 게슈탈트, 참나, 인간중심 네명의 상담자가 한명의 내담자와 두번의 만남을 그대로 옮겨놓은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인지행동 게슈탈트 순으로 좋았고 참나와 인간중심은 집중이 되지 않더군요. 특히 인지행동치료 부분은 조현주 교수님께서 진행하셨는데 딱딱하거나 지시적이지 않은 따뜻한 인지행동치료가 실려있고 심상개입에 대해서도 충분히 다뤄지고 있어서 감동했어요. 기업상담은 이전에 브런치에도 남겼던 책입니다. 벌써 30살에 가까워진 이 책은 여전히 사내 기업상담자에게 꼭 맞는 논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업상담에 관심이 있다고 꼭 추천하고 싶어요.


  올해 읽은 책의 MVP는 정서와 작업하기 입니다! 애착과 심리치료도 참 좋았지만 정서의 관점에서 심리치료의 큰 3줄기에 대한 그간의 연구와 임상 실제를 샅샅이 정리하고 통합하면서 명료한 느낌이 들었어요.

 


  쓰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그동안 브런치에 기록해 남겨두고 싶은 경험들이 꽤 많았나 봅니다. 이제 후련한 마음으로 가을의 선선하고 상쾌한 공기와 하늘을 맘껏 누려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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