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노트 17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네요. 난생처음 심한 기침감기도 앓아보고, 묵호항으로 여유로운 여름휴가도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느낌과 생각들을 갈무리해 봅니다.
1. 좋은 상담의 의미가 계속 구체화되고 변화한다.
오랫동안 상담에서 일어나는 '아하 모먼트(깨닫는 순간)'가 변화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러나, 요즘은 "있는 그대로의 존중"이 어쩌면 전부라고 느껴요. 그것이 내담자가 자신의 내적 경험을 거부하거나 비난하는 걸 멈추고 희망을 품게 하니까요. 변화하고 싶은 동기, 즉 로저스가 인간 모두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던 자기실현 경향성이 발현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본인상에 대해 안타까움보다 부러움을 느끼는 내담자에게, 상담자도 불안을 느끼며 안심시키거나 문제시하기보다는,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을까요' 그 괴로운 심정을 먼저 알아줍니다. 그러려면 상담자는 자신의 불안을 알아차리고, 내담자에 대한 잠정적인 가설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무조건적 존중은 우리의 내적 경험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지, 어떤 행동에 대한 허용이나 동의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상담자인 나도 그 존중이 마치 방임이나 과도한 허용이 되지 않을까 헷갈려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존중이자 자율성에 대한 지지는 방임이나 무분별한 허용과는 다릅니다.
무조건적 존중은 단지 내담자에 대한 반응으로만 전달되거나 표현되지 않아요. 내담자가 상담자와의 관계를 안전하다고 느끼는지를 점검하면서, 그렇지 않다면 상담관계에 대한 느낌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개방적으로 탐색하고, 그래도 어렵다면 신체적으로 안전감을 느낄 수 있는 신체기반 작업들도 고려해볼 수 있어요.
제한된 재양육의 관점에서 본다면, 안전 기지로서 안전감을 느끼고 관심을 전달하고 깊이 존중받는 경험이 되어야 하고, 그러고 나면 안전한 피난처로서 새로운 경험을 시도할 때 불안을 견디도록 함께 버텨주고 구체적인 행동계획과 피드백을 통해 안정감과 유능감을 느낄 수 있게 돕습니다.
요약하자면, "무엇이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고 좋았고 안 좋았는지, 그건 왜 좋았고 안 좋은지"를 궁금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애적인 내담자라면,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지, 그것이 좌절되어서 얼마나 힘든지를 충분히 따라가고 존중하는 것이 우선 필요합니다.
2. 양육코칭, 자기결정이론, 아동기 짜증
요즘 양육코칭을 연달아 하면서 재밌고 보람이 있어요. 양육스트레스를 점검하고, 자기결정이론을 토대로 양육행동을 살펴보고, 새로운 양육행동 2-3개를 구체적으로 계획해보고, 실제로 해보니 효과적이었던 부분과 어려웠던 부분을 점검해서 피드백하는 과정입니다. 각자 다른 역할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복잡하지만,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근본적으로는 따뜻하고 단순해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이들과 가족의 행복이니까요. '원하는 것'이 명료하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자기결정이론에서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3가지로 제안합니다.
- 바로 관계성, 유능성, 자율성입니다. 부모님들이 가장 많이 헷갈려하고, 상담자인 나도 헷갈렸던 부분이 바로, 자율성의 지지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자율성의 지지는 무조건적 존중과 연결됩니다. 너에게 그런 욕구와 감정이 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좌절스럽고 짜증이 나는구나. 알아주는 것입니다. 그 욕구, 감정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걸 인정해주는 것이 불건강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훈육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사회에서 효율적으로 적응하고 어울리고 기능하기 위해서.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유능성의 욕구가 있어서이기도 해요. 아이들은 명확한 구조, 즉 어떻게 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처벌을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기를 원해요. 그러면 구조 안에서 불안하지 않게 규범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규범 안에서 성취하고 유능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가요? 아이들이 하기 싫거나 지루한 활동을 하면서 짜증을 내지만, 사실 그 구조가 없다면 아이들은 불안하다는 말이요. 이 돌다리를 건너도 되는지, 이게 바람직한지, 항상 맘 졸이며 위축되거나 짜증이 나게 됩니다.
- 그렇다면 구조와 존중을 동시에 할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노력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인간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스펙트럼의 양극단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두 측면은 독립되어 있어요. 감정과 욕구를 알아주고 존중한다는 것은, 그 행동을 인정하거나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과 욕구를 알아준다고 해서 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이어진다면 다른 행동의 연결고리가 있거나 우연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구조를 주면서 방임하지 않고 관여할 수 있고 너무 많은 허용을 하지 않으면서도 자율성을 지지할 수 있어요.
화난 감정, 짜증을 고쳐줘야 할까, 어떻게 해야할까
- 초등학교 저학년 아동기까지는, 아이들이 아직 전두엽 발달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서적인 뇌가 열심히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규칙이 잘 먹히지 않는 것이 어떤 면에서 '당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징징대고, 우기고, 짜증냅니다. 그 행동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아직 생물학적으로 그럴 나이이기 때문이에요. 더구나 감정이 가득 차있으면 알기 어려운 감정을 차근차근 생각해보고 말하기 어려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 먼저 아직 생물학적으로 그럴 나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그다음은 오히려 쉬워집니다. 아이들은 감정을 다루기 어렵고 감정을 못 이겨서 여러 행동을 하게 됩니다. 짜증나는 감정과 표출은 자연스럽고 억누르는 것은 부자연스럽죠. 부모님이, 선생님이, 윽박지르거나 훈계를 하면, 그 감정을 사라지는게 아니라 억누르게 됩니다. 여전히 아이의 몸에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감정이 분화되지 않고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로 '짜증'으로 감정이 뭉쳐져 있어요.
- 부모님은 아이가 그 힘든 감정을 건강하게 다치지 않게 표현하고 스스로 해소하며 조절하는 유능감을 가지도록 방법을 제시하고 보여줄 수 있어요. 모든 '감정'은 잘못된 게 없이 자연스럽고,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면 가능해집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스트레스볼을 쥐고 펴거나, 베개를 때리거나, 낙서, 종이 찢기, 벽밀기 등의 발산 행동들이 있습니다. 다치지 않고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인데, 부모님이 먼저 함께 해보자며 연습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종이를 찢고 베개를 때리면, 너무 공격적인 건 아닌지, 다른 애들한테 가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발산행동을 건강하게 해소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 그것이 타인에 대한 공격행동을 지지하거나 허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렇게 통제하기 어려운 짜증스러운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면 이제는 아이에게 어떤 마음이었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아이의 언어적 뇌, 인지적 뇌는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감정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이죠. 아마도 아이에게는 아직 그걸 표현한 단어들 언어가 없기 때문에 말하기 어려워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이 선택지를 주어도 좋습니다. '서운했어? 억울했어? 답답했어? 이걸 먹고 싶었어? 어떤 걸까?' 감정이든 생각이든 욕구든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함께 찾아봅니다. 부모님이 예시를 들어주기 어렵다면, 휴대폰 검색창에 '감정 단어'를 검색해 '이미지'탭에서 적당한 목록을 골라 하나씩 함께 찾아봐도 좋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감정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 욕구, 생각을 가만히 고민하며 찾아보는 연습을 할 수 있고, 점차 스스로 언어로 표현하며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과 유능감을 습득하게 됩니다.
3. 요즘 상담에서 느꼈던 조각들
삶에는 이유가 없다. 우리가 태어나길 선택한 게 아니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데서 이유가 생긴다. 일하고 관계 맺으면서.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나 내 특성을 떠나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가치다.
타당화는 정확한 사이즈의 단어로 하지 않으면 와닿지 않는다. 너무 모호하거나 크면 와닿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심리적 상처가 크고 많았던 내담자에게 격려가 중요한데 이 때 격려는 담담해야 한다. 정확하고 사이즈가 맞아야 한다. “대단한 걸음을 시작했다” 이들이 그렇게 느낄까? “의미 있는 걸음을 시작한 거죠” 정도가 설득이 되는 사이즈의 언어다.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하다보니 많았다” 당면문제가 있으면 이번 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올 수 있는데, 선명하지 않다 보니 상담에 와서 상담자의 질문에 반응해서 말을 하게 된다. 상담 초기에는, 주호소와 당면 문제를 정확한 언어로 추려서 상담자와 내담자가 같은 당면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하기.
내담자의 심리적 경험을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함께 봐주기. 무엇이 그래서 이 사람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가, 무엇을 보아야 할 시점인가. 해묵은 역동에 휘말리느라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내담자에게 '죽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해서 그걸 믿으며 무력해지고 불안해지기보다, 내담자에게 주어진 희망과 잠재력이 분명히 있다고 여전히, 믿기. '맞아 당신이 힘든 부분이 많아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야' 믿기, 나에게는 '당신의 반짝이는 부분 재치 있는 부분도 보여,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건 함정이야', '상황이 막막한 것도 사실이지만 선택지가 없는 것은 아니야 언제나 다른 선택지가 있어'
상담은 함께 추는 춤이다. 상담의 안전감과 경제성 사이에서 상담자도 춤을 춘다. 사례개념화와 개입이 늦어지면, 내담자가 어느 시점에 말하면서 시원해지는 시기를 지나 하소연만 하거나 입씨름만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말해도 바뀌는 게 없고 또다시 현실은 답답하고 막막하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핵심으로 다가가려 노력하면 안전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상담자는 그 사이에서 춤을 추고, 그럼에도 언제나 오해와 균열은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그것을 개방적으로 다루며 내담자와 춤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4. 좋은 수퍼비전은 무엇일까?
좋은 상담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가 변화하면서, 좋은 슈퍼비전의 의미도 다양해집니다. 요즘 두 분의 선생님에게 집단 수퍼비전을 받고, 한 분의 사례발표 참관을 하면서, 또 그 의미가 구체화됩니다. 이전에는 내가 '깨달음'이 변화의 요소라고 느꼈던 것처럼, 좋은 수퍼비전이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어요. 제한된 정보 안에서 내담자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밑그림을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전달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오랜만에 만났던 선배 선생님께서는 '그건 선생님한테 깨달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네요'라고 반영해주셨습니다. 그 순간, 아 내가 좋은 수퍼비전에 대한 고정된 기대가 있었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초심 상담자에게는 자신의 불안을 다룰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게 사례개념화 이전에 필요할 수 있듯이. 상담자 개인마다 욕구, 기대와 발달단계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필요한 것도 달라집니다.
내가 요즘 바라는 수퍼비전은 "탐색이 필요한 부분 전달 →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사례개념화 전달 → 사례개념화를 따라가고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질문 → 당면과제와 개입 (추려주기) → 상담자 내담자 역동 전이 역전이 (예상되는 재현과 치료적 활용)
왜 사례개념화를 전달하고 지도 받는 게 중요할까? 내담자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하기 위해, 내담자의 맥락을 이해해서, 현재 어려움에 대해 공감적인 태도로 개입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밑그림을 토대로 앞으로의 개입방향과 전략을 설정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