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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환희 Aug 26. 2015

농지개혁과 세습

해방 후 건준이 서고, 인민공화국을 거쳐 미군정에 이르기까지 인민 기층은 왼편으로 쏠렸다. 친일청산에 농지분배까지 거침없이 처결한 삼팔선 이북에 꿈을 둔 이가 많았다. 미군정 아래 적산이 배분 되는 과정과 왜정 때의 행정, 치안 체계가 효율적 통치 체계라는 이름으로 지속되는 상황에 염증을 느꼈다.
 쏠림을 막아준 요소가 몇 있지만 48년 정부 수립 후 농림부 조봉암 장관이 주도했던 농지 개혁을 첫손에 꼽는다. 반민특위 해산과 몽양, 고하, 백범을 비롯한 숱한 인사들의 피살, 지도자급 인물들의 월북 행렬, 산업 기반시설의 이북 편중 등은 김일성이 남침에 자신을 갖게 했고, 거기에 박헌영의 이른바 전시 후방 교란론이 힘을 더했다.
 핏빛 이상의 공산주의와 맞서는 남한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이었다. 복잡한 정세를 뒤로 두고 해방과 전후를 지배하는 정신은 공평과 정의에의 갈망이었다.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의 남한 농지개혁은 그래도 내 땅에서 희망을 걸고 살아보자는 마음을 먹게 했다. 훗날 4.19 이후 공무원 공개채용 제도가 도입됐고 각종 고시들은 남한 천변에서 용이 날 수 있고 자수성가를 할 수 있다는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에 첫 선거부터 누렸던 보통선거라는 제도를 더해 당대 정신을 이뤘다.
 이후 쿠데타. 정부, 학계, 언론, 문단, 군 요직에 만주 인맥, 경성제대와 조선사편수회 계보, 총후보국 귀축미영을 외쳤던 표변인사들이 원로를 자임해 반칙과 편법, 연고주의, 세습이 자행하는 사회에 이르게 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이어온 이 마당에 채용청탁이니 음서제니 하는 말들이 생급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를 바로 잡는, 아니 그런 노력이라도 주도할 의지와 구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사회는 닳고 곪아가는 중이다.
 7가지(연애, 결혼, 출산, 꿈, 희망, 내 집 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것에 더해 내심 통일까지 포기하는 8포가 아닌가 했던 나는 순진했다. 8포의 마지막은 통일이 아니라 국적이라고, 짐 싸들고 헬조선을 탈출하려는 행렬이 불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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