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자처럼, 철학자처럼, 나는 걷기 예술을 배웠다
‘로맨틱가도(Romantische Straße)’를 따라가느냐, ‘검은 숲(Schwarzwald)’을 지나가느냐. 독일남부 여행을 할 때 반드시 거쳐야할 문제다. 심사숙고한 끝에 작고 아름다운 도시를 따라 뮌헨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로맨틱가도를 선택했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로맨틱’이라고 불릴까? 과연 이 도시들은 독일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꽃과 색채로 가득한 동화 속 마을이 연주하는 환상곡에 푹 빠져버린 채로 뷔르츠부르크에서 빠져나와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독일 남서부 지역. 하이델베르크도 이 주에 속한다. 서쪽으로 프랑스와, 남쪽으로 스위스와 국경이 맞닿아있다)의 명물인 검은 숲을 지나더라도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수림이 빽빽하게 우거져 근처가 검게 보인다는 이 숲은 이름부터 환상적인 상상과 문학적인 상징이 담겨있었다. 그곳을 지나친 후에 만나게 되는 도시는 어떤 곳이든 낭만적일 수밖에 없다. 독일남부여행에서는 어디로 가든 하이델베르크로 향하고 있고, 그 여정에는 필연적으로 낭만과 상상이 함축되어 있다.
하이델베르크가 낭만의 도시로 불리는 것은 ‘대학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리마다 철학과 예술과 사랑을 논하는 지적이고 시적인 젊은이들이 활보할 거란 상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이델베르크에는 과연 대학들이 많다. 그 중 1386년에 설립되어 독일 최초의 대학으로 기록된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이 되면서 젊음과 낭만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이델베르크에 매료된 사람은 북쪽의 공국에서 온 황태자뿐만이 아니었다. 괴테, 헤겔, 야스퍼스, 횔덜린 외에도 빅토르 위고, 마크 트웨인 등 왕성하게 활동한 수많은 철학자와 문학가들도 이 도시에 송가를 바쳤다.
괴테는 1797년 8월 26일에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이 도시는 지형과 주변 경치가 어우러져 무언가 이상적인 것을 갖고 있다. 예술가가 자연에서 취해서 자연 속으로 옮겨 놓으면 비로소 분명해질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것을 말이다.” 괴테는 도시를 감상하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는 네카 강을 건너 언덕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산책로를 택했다. 이곳은 앞서 언급한 철학자들이 사색을 위해 걸었던 ‘철학자의 길’과 일치한다. 괴테 시절에도 이 길이 철학자의 길로 불렸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괴테가 걸었기에 분명 이 길은 더욱 철학과 문학의 길이 되었다.
실제 하이델베르크를 둘러보면 3만 명에 달한다는 대학생들보다는 각자 어떤 낭만과 상상을 사로잡혀 도시를 체험하려는 관광객들이 훨씬 많다. 나를 포함한 관광객들은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는 루소의 <고백록>에 등장하는 문구를 신봉하는 사람처럼 기꺼이 가파른 산책로를 따라 올라갔다. 철학자의 길이 느릿느릿한 산책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심장을 자극하는 정도 성큼성큼 걸어야 할뿐더러, 경사지를 오르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이 뛰고 혈액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조금 힘들어질 즈음 오히려 정신은 맑아지며 새로운 기운이 솟는다. 새 혈액이 돌아 심장을 뛰게 하는 걷기야말로 새로운 탄생의 동력이 아닐까?
내 앞에는 금발의 청년들이 자전거를 어깨에 짊어진 채 언덕의 가장 높은 곳까지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이들은 하이델베르크의 대학생일까? 나의 이십대가 불현듯 떠올랐다. 부끄럽고 무력하지만 미래가 하나도 두렵지 않았던 지난 시절의 내가 철학자의 길을 함께 걷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철학자의 길은 고요하고 심오한 사색보다 들끓는 감정과 의문을 품게 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 길은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활짝 펼치며 장엄한 결론을 내듯 끝난다. 고요하고 짙푸른 네카강, 장밋빛으로 물든 시가지와 붉은 성당, 절반쯤 폐허가 된 고성, 그리고 이 모든 도시를 푸르게 감싸고 있는 숲과 산... 감탄사를 터트릴 수밖에 없는 이 풍경 앞에서 괴테가 ‘이상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장밋빛 먼지가 감도는 오래된 건물을 본다는 것
하이델베르크는 짙은 안개로 나를 맞았다. 경계가 흐려지고 모든 색채가 빛바랜 듯 장밋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서서히 안개는 걷혔지만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빛바랜 장밋빛이 더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지붕도 벽돌도 길도 장밋빛인 하이델베르크는 과거 어느 시점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장밋빛의 정체는 지역 특유의 분홍사암이다. 언덕 위의 고성에서 시작된 분홍빛 물결은 구시가의 저편까지 이어진다.
하이델베르크 고성은 반쯤 허물어지고 반쯤은 완벽하게 복원한 채로 과거의 영화로움과 폐허의 쓸쓸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방랑시인은 횔덜린은 1800년에 출간된 시집에 “묵직하게 골짜기를 향해 온갖 운명/말해 주는 거대한 성이 매달려 있었소./온통 풍상에 시달리고 쓸린 채로;/그래도 영원한 태양은/노쇠해가는 거대한 상像 위로 젊어지는 빛을 쏟아 부었고”라고 이 성에 대해 쓰고 있다. 그 시절에도 분명 이 성은 노쇠한 채였다.
하이델베르크 성에 대한 기록은 12~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르네상스 풍으로 지어진 오트하인리히 관에서 바로크 시대의 화려한 장식성을 보여주는 프리드리히관으로 수백 년에 걸친 시간이 압축되어 문 하나로 연결된다. 하이델베르크는 요새의 역할을 톡톡히 해서 팔츠 선제후(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의 왕이나 로마황제에 대한 선거권을 가진 제후를 말한다) 가문이 500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그들의 흔적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와인통과 건축시기가 각기 다른 건축물들이 증명한다. 유럽의 미술사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양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성인의 조각상에 그리스와 로마의 신상들까지도 자리 잡고 있는 다양성을 이 도시의 자유로움과 낭만성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선제후의 묘가 있는 고딕풍의 성령교회는 유난히 붉은 빛을 자랑한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행위를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도 할까? 과거는 복잡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어떤 과거는 자유와 학문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 뿌옇게 가라앉은 앙금이기도 하다. 거기엔 하이델베르크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중심지였던 과거도 포함된다. 나치의 오른팔인 괴벨스가 하이델베르크대학 출신이었다. 노벨상 수상자가 55명이나 배출된 이 대학도 나치즘에 찬동하며 유대인 교수들을 제명하고 수용소로 보낸 전력이 있다.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의를 빼앗기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하이델베르크를 떠나지 못했던 야스퍼스와 결국 수용소에서 고난을 겪었던 한나 아렌트의 삶을 이 도시는 숨기지 않고 있다.
베를린, 쾰른,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등 독일의 주요도시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도시를 재건하면서 역사유적도 모두 새로 복원했지만 하이델베르크는 공습의 위협에서 벗어나있었기에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중에는 ‘신성한 산’으로 불리는 하일리켄베르크의 고지대에는 1934년에 지어진 원형극장도 있다. 당시 청소년노동봉사단이 분홍사암으로 지은 고전적인 극장에서는 나치를 찬양하는 각종 행사가 벌어졌다. 빛나는 유적지가 될 뻔 했던 이 극장은 창백한 냉기에 휩싸인 채 방치되어 있다.
오래된 장밋빛 건물들은 오래전 중세의 대학도시이자 제후국들이 아름다운 왕자를 보내 교육시키던 시절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 이후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쌓아올린 지적인 성과와 불의에 침묵하던 시간들도 포함하고 있다.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철학의 시대에는 유토피아를 향한 노력과 제국주의의 허상이 공존했고 선의와 악의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장밋빛 먼지가 감도는 건물들을 바라보는 것은 복잡한 과거를 들추는 일이다. 잊어서는 안되는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예술과 사랑의 순간들
네카강을 가로지르는 카를 테오도르 다리를 건너면 강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가고 있는 것 같다. 다리의 규모는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지만 다리 양편의 서있는 조각상들과 뾰족한 탑신이 있는 문이 이 다리를 특별하게 만든다. 원래 성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는데 성곽은 사라지고 문만 남은 것이다. 18세기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가 나무다리에 불과했던 이곳을 돌로 아름답게 만들었다 하여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카를 테오도르가 궁금하다면 다리 중앙에 있는 조각상을 들여다보아도 좋다. 문을 통과하면 시가지가 펼쳐진다. 비스마르크 광장 앞으로 이어지는 하우프트거리는 하이델베르크 여행자들이 모두 지나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분주한 도심인 이곳은 걷는 자들의 천국 같은 곳이다.
하우프트 거리 160번지 건물 출입구 상단에는 1829년에서 30년까지 슈만이 머물렀다는 안내판이 비밀스러운 메시지처럼 붙어있다. 어려서부터 음악과 문학에 심취했던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 슈만은 법학도로서 이 도시에 발을 디뎠다. 법학을 하기를 간절히 간청한 어머니 때문에 법학도가 되긴 했으나 그는 어쩔 수 없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찾아가 음악을 배우곤 했다. 다시 법학을 하겠다며 하이델베르크로 온 데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법학과 교수가 음악가였던 것이다.
젊은 슈만은 음악의 열정으로 타오르며 하우프트 거리를 걸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음이 거대한 강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법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고르게 흔들리던 인생의 추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버렸을 때 어떤 감정이 찾아올까? 여행자처럼 흥분될까? 오히려 차분해지고 용기가 솟아날까? 아니면 두려워질까? 어쩌면 그때는 깨닫지 못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이 인생의 결정적 순간임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여행은 진지한 사색의 시간이다. 삶을 초월한 시간을 경험하며 마음으로 추구하는 바를 위엄 있게 꺼내들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를 삶의 터널을 지나는 정화의 과정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괴테가 후에 하이델베르크를 여러 차례 다시 찾은 이유는 은행가 빌레머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 마리안네와의 사랑 때문이었으니까. 나이와 지위, 어떤 세속적인 조건에도 아랑곳없이 사랑 그 자체에 몰두했던 괴테로부터 황태자의 첫사랑이 품고 있는 옛 독일의 사랑과 낭만을 다시 읽는다. 사랑으로 통하지 않는 길은 없다. 하이델베르크도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