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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사 Sep 01. 2015

알랭 드 보통 - 행복의 건축

생활 속의 아름다움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할까'로 유명해진 작가다. (비싼 양장본에 여백의 미를 살린 편집으로 새로 나오기 전 구버전을 가지고 있어 더욱 행복;;;) 소설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원제인 Essays in love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에세이에 더 가깝다. 소위 요새 유행하는 크로스오버라고 할까. 소설이면서 동시에 에세이이기도 한. 그러나 이후에 나온 후속작들은 전작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 나온 이 책으로 다시 슬금슬금 이름이 들리는 것을 보니 괜찮은가 싶어서(여행의 기술을 한 권 더 준다는 말에 혹한 것도 있고) 냉큼 구입했다. 개인적으로 건축에 대한 관심이 드높은 것도 이유가 되고.


재미난 것은 이 글의 정체성이다. 제목에 건축이 들어갔고 소재에도 건축물이 이용되니 '이 글이 건축에 관한 글인가?'라고 묻는다면... 고개가 절로 갸웃 기울어진다. 아주 드물게 어려운 건축용어가 나오지만 그저 그뿐이다. 고전주의 양식이라던가 공학의 원칙이 대두된 모더니즘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건축양식의 변화과정을 소개한 건축역사서 또한 아니다.


이 작가 소개면 빠지지 않는 문학과 철학 등 인문학 분야에서 박학다식한 작가답게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집을 시작으로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나간다. 이 글은 분명 에세이다(매우 높은 레벨의 혼자놀기와 공부하기라고나 할까;;). 방대한 문헌조사를 통해 '건축'을 공부한 후 그것을 소재로 아름다움에 관한 자신만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그야말로 고차원적인 사고놀이의 궁극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나불나불 떠들어 자신이 가진 지식을 자랑하는 차원이 아닌 제대로 씹고 삼켜 작가 안에서 충분히 소화해 자신만의 생각을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한참 이해력이 떨어지는 독자지만 어설픈 내가 볼 때도 알랭 드 보통은 '생각하기', '생각을 성장시켜나가기'란 어떤 것인가를 차근차근 보여주는 진정한 에세이 작가다. 순간적인 감상과 얄팍한 지식을 그럴듯하게 꾸며내 세치 혀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레벨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를 꾸미는 박학다식한이란 수식어구는 그저 그가 말하고 싶은 바를 가능한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지 전부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다. 독자가 에세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즐거움을 기대보다 더 많이 줄 수 있는 작가라면 지나친 찬사일까.


앗! 어쩌다보니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작가에 대한 찬사로 늘어졌는데... 이런 작가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과 이 책을 즐기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믿으므로 굳이 사설이 길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련다.


'행복을 위한 건축'은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한 테라스하우스'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평범한 집에 대한 묘사로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이미지로(한때 텔레비전에서 해피하우스라는 집을 리모델링해주던 프로그램이 빅 히트를 쳤던 것을 떠올려보자. 그때 바뀐 집을 바라보며 정말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을 말이다) 말을 이끌며 꾸미지 않은 다정함으로 다가온다. 딱딱한 용어를 그가 구사하는 편안하고 감성적인 어휘로 감싸 안아 살짝 긴장한 독자들을 부드럽게 안내한다.


집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성소가 되었다. 집은 정체성의 수호자였다. 오랜세월에 걸쳐 그 소유자들은 밖으로 떠돌던 시절을 끝내고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했다. 일층의 판석들은 노령과 나이든 우아함을 이야기한다. 반대로 부엌 진열장의 규칙성은 위협적인 느낌은 주지 않는 질서와 규율의 모법이다. 커다란 미나리아재비가 인쇄된 매끈한 탁자보가 덮인 식탁은 그 옆의 엄격해 보이는 콘크리트 벽 때문에 더 장난스러워 보인다. 층계를 따라 걸려 있는, 달걀과 레몬을 그린 작은 정물화는 일상적인 것들의 복잡함과 아름다움으로 관심을 유도한다. 창턱 유리 항아리에 꽂힌 수레국화는 우울의 흡인력에 저항하도록 힘을 보태준다. 위층의 텅빈 좁은 방은 회복을 꿈꾸는 생각들이 부화하는 공간이다. 천장으 크레인과 굴뚝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초조한 구름들을 향해 열려있다.

이 집이 그 거주자들의 수많은 병을 치료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들은 행복의 증거를 보여준다. 이 행복에 건축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했다.


이성적인 단어와 감성적인 단어가 어우러져있다. 그의 에세이는 처음에서 마지막까지 이런 모습을 유지한다. '건축'과 '행복'이라는 단어가 함께 있는 이 책의 제목처럼 말이다.


이쯤에서 이 책의 차례를 살펴보자(모든 책이 그러하지만 논문이나 에세이의 경우 목차는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좋은 작가는 절대 허투로 목차를 쓰지 않는다:).


1. 행복을 위한 건축
2. 어떤 스타일로 지을 것인가?
3. 말하는 건축
4. 집,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
5. 건물의 미덕
6. 들의 미래


행복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명사와 건축이라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단어를 결합하는 것으로 포문을 연 알랭드 보통은 다음 단계에서는 현존하는 건축물들을 되짚으며 그것이 가진 특징과 속성을 찬찬히 살펴 설명한다. 그리고 그런 인포들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화두와 결합시켜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준다.

무려 건축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사실이다.


스토크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첫째,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어떤 대상에서 인간 또는 동물을 연상한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의 내적인 눈은 구상적 회화의 표현 능력과 추상적으로 배열된 돌들의 표현 능력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추상적인 조각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탁자와 기둥을 좋아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구상적인 작품을 존중하는 이유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양쪽 어느 장르이든 인간과 동물의 속성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고 의미있는 것을 환기시켜줄 때 그 작품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일단 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우리 주위의 가구와 집에서 살이있는 형태를 암시하는 것들을 부족함 없이 찾을 수 있다. 주전자에는 펭귄이 있으며, 탕관에는 건장하고 자존심 강한 인물이 있으며, 책상에는 우아한 사슴이 있으며, 식탁에는 황소가 있다.


그리하여 챕터 3까지 읽고 잠시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모든 사물이 내게 말을 거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늘 무심히 스쳐지나간 네모난 창문과 거리의 간판들, 자동차의 백미러의 모양 등이 어떤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유쾌하지많은 안다. 어떤 것은 보기만 해도 즐겁고 어떤 것은 보는 순간 절로 이맛살을 찌뿌리게 만든다. 그러면서 우리의 눈은 자연스럽과 미美와 추醜를 구별하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쯤이 되면 책을 읽는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짓게된다. 작가가 무엇을 위해 행복과 건축을 끌어왔는지가 짐작이 되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표제로 드러난 행복과 건축 이외에 필연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책읽기에 동반된다. 그리고 챕터 4 이후로는 이전에는 없었던 소제목들이 나타난다.


4. 집,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
   - 기억
   - 이상
   - 이상이 변하는 이유

5. 건물의 미덕
   - 질서
   - 균형
   - 우아
   - 일치
   - 자기인식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 '나'는 건축에 개입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환경이 우리가 존중하는 분위기와 관념을 구현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주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건물이 일종의 심리적 틀처럼 우리를 지탱하여,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우리 내부에 필요한 것ㅡ그러나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위험이 있는 것ㅡ을 표현해주는 물질적 형태들을 주위에 배치한다. 벽지, 벤치, 그림, 거리가 우리의 진정한 자아의 실종을 막아주기를 기대한다.

어떤 장소의 전망이 우리의 전망과 부합되고 또 그것을 정당화해준다면,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는 말로 부르곤 한다.


건축과 내가 상호작용을 시작하는 것이다. 집은 그래서 단순히 바람과 비를 피하게 해주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목적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고 나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나의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든 것처럼 건축 역시 인간과 사회가 가진 기억의 산물이며, 나의 이상이 나의 미래이듯 건축도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이상에 따라 변하고 새로운 이상을 제공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영혼처럼 '아름다움'이 붙어있다. 비록 취향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다르다하더라도.


그리하여 챕터 5에 이르면 드디어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음껏 펼친다. 나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는 건축물과의 관계의 가운데에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강조하며.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떤 도시가 어떤 건축물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여기며 왜 그것이 아름다운 것인가에 대해. 더욱 나아가 앞에서 말한 모든 요소들, 환경들과 더불어 어떻게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그리고 챕터 5의 마지막 소제목 '자기인식'은 그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은 다른 말로 바꾸자면 행복이란 단어로 대표되는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건축이며, 그것이 이루어질 때 아름다움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미학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요구를 이해하고, 이렇게 이해한 것을 건축 계획이라는 명료한 언어로 바꾸어야 하는 어려움을 고려할 때 그렇게 잊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방에 조명이 적당하고 층계를 찾아다니는 것도 편할 때 그런 전환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실제로 행복에 관한 이런 직관적인 느낌을 그 이유에 대한 논리적인 이해로 바꾸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설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안다고 믿었던 것을 씻어내고 끈질기게 우리의 조건반사 뒤에 감추어진 기제를 쪼개보고, 불을 끄거나 수도를 트는 것 같은 일상적인 행동의 신비와 아연할 정도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건물들이 이런 자기인식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슬프게 증언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건축가들이 자신의 요구에 대한 무의식적 이해를 남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믿을만한 지침으로 바꾸어내지 못한 방이나 도시가 많은 것도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공감의 실패라는 별로 신비할 것 없는 이유때문이다. 사람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건축가들 탓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캐물으며 미로와 같은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우리가 이러저러하다고 단정하는 단순한 관점의 유혹에 넘어가버렸다.


그러나 챕터 5까지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던 작가는 챕터 6에 와서는 두리뭉실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만다. 솔직히 말해 좀 뜬금없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이 책의 핵심은 챕터 5였고 챕터 6이 굳이 필요했을까..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260페이지에 걸쳐 장장 늘어놓더니 결국 건축물이 세워지는 '들' 자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아무래도 좀 걸렸는지 언급은 하는데... 책의 나머지와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고 이해도 상당히 부족하다.


건축이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공물이니까 들의 미래는 (그가 볼때) 건축물로 채워질 테니까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도록 자연의 미를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은 이해는 하는데... 사족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연과의 조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공존할 줄 알았던 아시아와는 달리 서양 역사에서의 건축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는 생각했을지언정 자연에 대해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성향을 숨기지 못했으니까, 그걸 인식한 작가의 지레찔려 자백하기라고나 할까. 나츠메 소세키의 일화를 빌어 언급한 마지막 챕터는 건축의 미래에 있어서 자연을 포함해야할 것 같다는 (챕터 5까지의 자세하고도 꼼꼼한 전개와 비교해) 막연한 생각내지 제언 정도이다. 만일 그가 서양 뿐 아니라 동양의 건축까지 공부했더라면 이 챕터의 비중이 상당히 올라갔으리라는 과감한 가정도 해본다.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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