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Mar 25. 2019

욕망의 바구니를 들여다보자

지금 퇴사할까, N잡할까 고민하고 있다면


사실 '꼭 두 개의 직장에 소속을 두고 일하는 N잡러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N잡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N잡러가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상황이 만나 만들어진 결과인데, 그 결과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N잡을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음 직장에서 뭘 해보고 싶은지를 살펴본 과정 자체다. 사실, N잡을 시작하기 전에는 굉장히 모호하게 '지금 없는 일의 형태로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다. 이 마음을 포함해 내가 원하는 것들을 리스트업 했던 것이 결국 나를 N잡러의 길로 데려다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일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일 할까라는 고민이라기 보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를
묻는다는 것은


물론 내가 원한다고 해서 모든 조건이 그것에 맞춰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한다는 것은 일의 파도에 어떤 방식으로 올라탈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해준다. 내가 원하는 것을 돌아보고 조건들을 정리하면 내 뜻과 다른 조건들에 대한 대응 방식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어떤 조건이 다르다면, 그것을 받아들일지, 버릴지에 관해 선택지가 생기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조건을 변경하거나,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자원을 찾아보거나. 이 밖에도 수많은 일-선택의 경로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모든 요소들이 이번 선택에 거의 없다면(그런 선택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이다음 스텝을 더 영리하게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직이나 취업에 앞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묻는 것은 좀 낯선 일일 수도 있다. 늘 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진짜 했는지 궁금한 바로 그것이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나의 욕망에 대해 묻는 일이다. 우리는 '욕망'에 대한 질문을 거의 받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질문을 따지자면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을 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몇 가지의 직업으로 대체된다. 나의 선호가 반영되어 있지만, 구체적이지 않거나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에는 어떤 욕망이 투영될까? 마케터라는 직업에는? 작가라는 직업이 '글을 쓰고 싶어서'라는 욕망만 있으면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내 욕구와 제대로 깨달았을 때, 마케터이든 작가이든 선생님이든, 다른 사람에게 없는 한 끗을 할 수 있는 직업인이자, 일하는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멋진 생각을 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를 물은 건 아니다.


왜 그만두고 싶어,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욕망의 바구니 채우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문득 불안해졌다. 그냥 다니던 곳 잘 다니면 될 것을 왜 그만둔다고 말해버렸을까. 요즘 취직이 그렇게 어렵다던데, 내가 헛짓거리를 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런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랩탑을 열고, 내가 왜 회사를 그만 두기로 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나는 어떻게 일하고 싶은지, '일하는 홍진아'의 욕망의 바구니를 만들고 그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고민해서 다음의 여섯 가지 항목을 만들어냈다.


1.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간을 나누어서 해보는 실험을 하고 싶다.
2. 콘텐츠 기획자로 살고 싶은데 지금의 경험이 이것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3. 내가 지금 회사에서 받는 월급 이상을 받고 싶다(월세를 올리고, 약간의 소비를 늘리고 싶다).
4. 내가 조직에서 하는 일 이외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받고 싶다.
5. 혼자 일하고 싶지 않다.
6. 출퇴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리스트는 중요도 순으로 나열했다. 일을 그만 두기로 했을 때, 할 수 있다면 늦기 전에 일-실험을 해보자는 욕구와 6년 차로 넘어가던 나의 커리어가 콘텐츠 기획자의 그것으로 잘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했던 당시의 욕구가 반영되었다. 거기에 월급이 더 오르면 좋고, 또 조직에 대한 로열티와 사이드 프로젝트가 서로 배치되는 가치가 아니라는 생각을 이해받으면 더 좋고, 팀으로 일하면 더더 좋고.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때가 맞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리스트를 같이 얘기해 볼 수 있는 회사를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엔, N잡러


머릿속에 여섯 개의 리스트를 넣고 입사 면접을 보러 가기도, 받은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리고 꽤 오랜 기간 동안 회사와 나에게 알맞은 방향으로 일 환경을 세팅했다. 몇 번을 만나고, 또 몇 번의 메일을 주고받고, 계약서를 살피기도 했다. 그래서 내 욕망의 바구니에 담겼던 저 여섯 개의 리스트는 다 이루어졌을까?


1.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간을 나누어서 해보는 실험을 하고 싶다.

1번 덕분에 N 잡을 하게 되었다. 원래는 4일은 본업을 하고 하루는 어디도 소속되지 않은 채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2개의 소속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 모양은 사실은 1번 조건을 쓸 때 상상을 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내가 상상하지 못한 모양으로 일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상상하지 못한 모양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따랐지만, N잡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덕분에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기도 했다. 또한 내가 어떻게 일하는 사람인지를 좀 더 관찰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2. (콘텐츠) 기획자로 살고 싶은데 지금의 경험이 이것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획을 통해 판(온오프라인 플랫폼)을 만들고 유능한 플레이어들을 모아서 이들의 매력(능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콘텐츠 기획자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홍보 담당자, 지원사업 PM, 연구원 등의 일을 해온 나는 이 일들의 맥락을 기획, 그중에서도 콘텐츠 기획으로 잇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이 들어온 회사 중에 캠페이너이자 프로젝트 매니저를 할 수 있는 빠띠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기획을 할 수 있는 진저티프로젝트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모두 콘텐츠 기획만이 주 업무는 아니었지만, 시민 참여를 이끌어 내는 캠페인 기획이 곧 콘텐츠 기획과 맥락이 같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업무의 경우에도 출판이나 크라우드펀딩 등으로 내 기획 경험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 맥락에 꼭 맞는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향성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고, 내가 하는 일들을 콘텐츠 기획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타의 업무들이 고통스럽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3. 내가 지금 회사에서 받는 월급 이상을 받고 싶다(월세를 올리고, 약간의 소비를 늘리고 싶다).

연봉이 오르는 것. 이 또한 중요한 욕망이었다. 물론 엄청난 연봉 상승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받고 싶은 연봉을 정하고 그걸 한 바구니에 담아서 두 개의 조직과 나의 사이드프로젝트를 통해 나누는 일은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이전에는 '희망연봉'을 쓰지만 결국 회사의 테이블에 맞춰서 월급을 받았다). 이 경험은 연봉이 올랐다는 것 이외에도 나의 수입과 지출을 한 바구니에 넣고 보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월급이 쥐꼬리만 하다는(?) 이유로 수입이 생기면 그대로 지출을 하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루틴 하게 들어오는 돈 이외에 엑스트라로 들어오는 돈을 위한 통장도 만들었다. 그게 얼마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오로지 여행을 위한 통장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한 번도 '돈'을 주제로 바구니를 만들어 본 적 없는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고, 효과도 큰 항목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연봉이 훌쩍 오른 것이 아니다. 연봉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고, 내 바구니에 담아 그걸 운용할 수 있다는 감각이 다른 경제생활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4. 내가 조직에서 하는 일 이외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받고 싶다.

당시 나는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라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친구와 하고 있었고, 소셜 투자 계모임 <디모스>를 막 시작한 상황이었다. 이전 조직들에서 사이드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전인데도 그랬다. 특이한 사람이라는 시선, 또 본업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받으며 일을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이건 일을 얼마나 하느냐 보다는 내가 일에 로열티를 가진 사람이냐 아니냐를 종종 갈랐고, 일터와 나의 신뢰관계를 위태롭게 했다. 이 항목은 내가 회사를 평가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면접은 상호 간에 보는 거라고 하지 않나. 나 역시 이 조직에 내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우리는 상호 이해를 하며 일할 수 있는 관계가 될지 몇 번의 미팅과 메일, 함께 일하게 될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확인했다. 덕분에 내가 사이드프로젝트에서 경험한 인사이트를 일터로 다시 가지고 와 공유하고, 회사 안에서 내 일을 더 확장할 수도 있었다.


5. 혼자 일하고 싶지 않다.

퇴사하고 1인 기획자로 일했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보다는 팀으로 일할 때 더 신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전 직장에서 팀을 이끌며 깨달았다. 개인의 성과에 대해 칭찬을 받는 것보다 팀의 성과를 칭찬받을 때 더 기쁘고 좋았다. 아마도 대화나 협업을 통해 생각이 확장되는 순간, 혼자 할 수 없지만 같이 할 수 있는 더 큰 규모의 일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결국 4일은 회사에서 일하고 하루를 프리랜서로 일해볼까 하는 생각을 접었다. 같이 일하고 싶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N잡과 하루 프리랜서 사이에서 엄청난 고민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6. 출퇴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학교 때 학교 교문 맞은편에 살았던 것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때는 학교 안 기숙사, 대학교 때는 방에서 강의실까지 빨리 걸으면 15분 컷(갑자기 tmi)이었기 때문인지, 나는 출퇴근 시간에 오래 대중교통을 타는 것에 취약하다. 멀미도 나고, 조금 멀리 갈라치면(그래봤자 40분) 오전에 기운을 다 쓰는 기분. 그래서 회사의 위치가 어디냐가 회사를 고를 때 중요한 요소(물론 6번이지만)이다. 짠 게 아닌데, 한 회사는 재택을, 한 회사는 동네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하면 되었다. 출퇴근 스트레스 없는 나를 위한 업무 환경인 것. 하지만, 문제는 여름쯤 두 회사 모두 성수동에 사무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재택을 하던 회사도 프로젝트 때문에 성수동으로 이틀 정도 가야 했고, 합정동에 본 사무실이 있던 회사도 하루 정도는 성수동 출근을 해야 했다. 욕구를 아무리 잘 정리해서 적용해도, 이렇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긴다. 이 변수가 내 욕망의 바구니의 상위에 있는 조건에 위배된다면 더 머물러야 할지 말지를 고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6번이었고, 그래서 괜찮았다... 음?


진짜로 원하는 게 N잡 맞나요?


퇴사를 하고 싶거나, 이직을 하고 싶을 때, 아니면 이번 기회에 N잡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왜 '그것'을 하고 싶은지 돌아보는 것이다. 그 속에 숨은 욕구를 찾는 것은 내 이다음 스텝이 어떤 모양을 가지게 될지 알려주는 키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직장 내에서 해소될 수 있는 욕구일 수 있고, 또 N잡을 하겠다는 생각과 달리 내가 이걸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프리랜서와 더 어울리거나, 잠시 쉬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 알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나에게 지금 필요한 일, 지금 필요한 쉼, 지금 필요한 기분과 조건들을 찾는 일은 귀찮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 내리막 세상에서 나를 지키면서, 나답게 일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