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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May 11. 2024

통장을 탈탈 털어도, 우아한 실패

맥시멀리스트의 우주 보기


"수강료로 월급을 다 탕진할 작정이야?"


 내가 코딩 수업을 듣겠다고 하자, 친구 A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의 말에 내가 현재 듣고 있는 강좌들을 속으로 되새겼다. 글쓰기, 영어 회화, 인디자인, 독서 모임, 헬스 PT... 나열하고 보니 통장이 아려왔다. A의 말이 맞다. 이렇게 수업을 듣다간 노후를 라면 국물로 연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좀 줄여야 하나 싶다. 배우는 건 많지만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 영어 회화는 몇 년째 어버버버이고, 디자인은 미적 감각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전국의 독서 모임 참여자 중에선 내가 제일 책을 안 읽을 것이다. 헬스는... 할 때마다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 이런 몸뚱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작년 초에도 갑자기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겼다. 연기였다. 나는 차를 타고 가다가 뜬금없이 말했다.

"나 연기 배워야겠어."

옆에 탄 와이프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연기 학구열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왜 갑자기?".

"난 천문학 강사잖아. 학생들한테 그리스로마 신화나, 천문학자들의 발견들을 들려줄 때 연기가 필요해"

"그렇다고 뭘 연기 학원씩이나?"

"그냥"


 이유를 몇 가지 더 대봤지만, 사실 '그냥'이라는 한 마디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연기가 해보고 싶었다. 집 앞에 맛집이 생기면 한 번 가보듯, 나는 곧장 연기 학원으로 달려갔다. 나는 연기 학원이 "진행시켜!" 같은 영화 대사를 따라 하며 소리치는 곳인 줄 알았다. 하지만 유명한 대사를 흉내 내자 선생님은 즉시 말했다.

"연기는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야. 유명한 대사를 하더라도 네 스타일대로 해봐"


 하지만 연기라는 것을 처음 접해본 인간에게는 스타일이랄 것이 없었다. 나는 발연기를 넘어 발냄새나는 연기 선보였다. 돌하르방 같은 표정으로 로봇 목소리를 내고 있는 나를 보더니 선생님도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가르침보단 수치심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셨는지 나의 연기를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주셨다. 그 영상을 보면서 녹음된 내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게 정말 나라고?

 그 충격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나를 지켜보는 다른 학생들도 모두 어쩔 줄 몰라했다. 결국, 부끄러움과 재능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두 달 만에 연기 학원을 그만뒀다. 두 달치 수강료는 무엇을 위해 쓰인 걸까? 차라리 삼겹살이나 몇 번 더 먹을걸.


 

금성의 모습과, 1970년에 발사된 금성 탐사선 베네라 7호

 관제센터는 정적이었다. 베네라 7호가 금성 표면에 착륙을 시도하는 순간, 소련의 과학자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앞서 베네라 1호부터 6호까지의 탐사선은 모두 실패하거나 연락이 끊겼다. 관제센터는 사실상 고급 우주 장비의 무덤을 또 하나 늘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라 7호가 금성 표면에 도착했다는 신호가 관제센터에 전달되자, 엔지니어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인류가 만든 기계가 다른 행성에 최초로 착륙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베네라 7호는 단 23분 만에 연락이 끊겼다. 23분 만에 수십억짜리 탐사선이 사망했다.

 원인은 금성의 극심한 환경이었다. 금성 표면의 온도는 섭씨 500도에 달하고, 대기압도 지구보다 90배나 높았다. 기압은 공기가 가하는 압력을 말한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무게로 환산해 보면, 지구에서는 땅 1평 위에는 약 33톤의 공기가 바닥을 누르고 있다. 다 큰 아프리카 코끼리 5마리가 올라선 것과 같다. 그런데 금성에서는 이 압력이 90배나 되기 때문에 금성의 1평 땅 위에는 아프리카 코끼리 450마리가 서 있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공기 압력이 가해진다. 베네라 7호는 이 극한의 압력과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망가졌다.

 과학자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었다. 수천억이 든 금성 탐사 프로젝트가 7번 연속 실패했다. 그러나 이어진 천문학자들의 발표는 놀라웠다.


"우리는 탐사선이 찌그러지고, 고장 날 정도로 금성이 척박한 환경임을 확인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보며 나는 감탄했다. 신박해서 무릎을 내려칠 정도였다. 이런 초긍정의 사고라면 천문학자들은 실패라는 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화성에서 감자 농사를 짓다가 폭삭 망해도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화성에서 감자를 키우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연기 학원을 다니면서 얻은 것은 '나는 연기를 하면 안 되는 인간이구나'하는 부끄러움 정도다. 하지만 그 덕에 내 일이 더 좋아졌다. 세상에는 내가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발냄새나는 연기를 통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정말 나에게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배우는데 지갑을 탕진하는 이유는 하나다. 배움에서 신선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명상만으로도 삶의 신선함을 찾지만, 나는 유튜브 없이 3분만 고요해도 이상함을 느낀다. 드라마도, PC 게임도 두 시간이 넘으면 지루해진다. 그래서 무언가를 배울 때 싱싱하게 전해지는 활력, 그 느낌이 좋다.

 이번 달에는 계획대로 코딩을 배울 것이다. 코딩 강좌를 추가하며 통장은 아프고 노후는 불안하며 하루는 더 짧아지겠지만, 나는 믿는다. 신선하게 반짝이는 순간들이 나를 더 생명력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방정리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논리적인 규칙을 쌓아가는 코딩을 어떻게 해낼지 의문이지만, 괜찮다. 혹 한계를 느낀다 해도 천문학자들처럼 뻔뻔하게 말해볼 테다. "저는 코딩을 잘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나는 천문학을 정말 애정한다. 천문학자들의 태도도 좋다. 이번달에도 무언가를 실패하는데 돈을 쓸 것이다. 그리곤 무언가를 배울 것이다. 아 이토록 우아한 실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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