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한 박스가 생겼다. 나는 고기와 쌀밥에 미쳐 날뛰는 흔한 30대의 비만(진)이지만, 언젠가는 고구마+닭가슴살 식단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왔다.
추석이 막 지난 아침, 샤워를 하고 나오자 화장실 문 앞에 체중계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와이프가 무게를 재고 둔 것인지 한동안 잊고 살던 내 무게를 깨우쳐주기 위해 놓은 것 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그 위에 올라서고 싶지 않았다. 지난날의 폭주들을 숫자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려움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고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조심스레 밟았다. 분명히 사뿐히 올라섰는데 체중계는 치명타를 맞은 듯 82kg이라는 숫자를 토했다. 인생 최대의 몸무게였다.
기껏 상쾌한 샤워를 마치고 나와 똥을 밟은 기분이었다. 거울을 보니 배는 가슴을 추월했고, 앙상해진 팔과 다리만 거대한 몸뚱이에 붙어있었다. 스티븐 스필 버그는 상상력으로 ET를 생각해 낸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ET를 바라보며 ‘저놈도 몸짱이 될 수 있을까?’하는 허무한 생각이 잠시 스쳤다. 걱정보다는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곧장 고구마 다섯 개를 집어 들고 에어후라이기로 향했다. 통 안에 고구마를 무심히 떨궜다. 온도는 180도, 시간은 20분을 맞추고 작동시켰다. 에어후라이기는 뭔가 쓸쓸한 소음을 내며 고구마 향을 퍼트렸다. 식단이 시작된 것이다. 불행도 식단도 영화처럼 한 순간에 다가온다.
"지구의 새로운 달일 수도 있습니다."
2002년 9월, 미국 애리조나의 한 아마추어 천문가는 밤하늘을 관측하던 중 10-50m로 추정되는 작은 천체를 발견했다. 그 천체는 달보다 느린 약 50일을 주기로 지구를 공전하고 있었다. 이 천체는 천문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곧장 J002E2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영국 BBC 방송은 지구를 도는 새로운 위성일 수 있다며 기쁜 듯 보도했다.
하지만 곧 정체가 밝혀졌다. 정밀 조사 결과, 이 천체는 1969년에 발사된 우주선 아폴로 12호의 부품이었다. 여러 단으로 분리되며 날아가는 새턴V 로켓의 3단 연료통이 우주를 떠돌다 다시 지구 궤도에 붙잡여 미니 달 행세를 했던 것이다. 거대한 우주 쓰레기에 속은 천문학자들은 떨떠름하면서도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우주쓰레기는 평생 별을 보는 천문가들도 헷갈리게 할 만큼 널려있는 존재가 되었다. 1957년 러시아가 세계 최초로 쏘아 올린 스프트니크 위성을 시작으로 약 만여 개의 위성들이 우주로 올라갔다. 자동차 한 대를 분해하면 수 백개의 부품이 나오는 것처럼, 위성도 수백 개의 부품으로 이뤄져 있다. 이는 곳 위성 하나가 수백, 수천 개의 우주 쓰레기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류 과학 기술의 정점인 인공위성은 잠재적 우주 쓰레기다.
가장 큰 문제는 우주 쓰레기들이 총알의 7-8배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현재 추정되는 우주 쓰레기의 양은 10cm 크기 이상 되는 것이 5만 여개에 이르고 그보다 작은 쓰레기들은 수억 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다른 인공위성과 충돌한다면 위성이 파괴되는 것은 물론, 또 다른 수백 개의 위협적인 우주쓰레기를 만들게 된다. 충돌로 생긴 쓰레기들 역시 새로운 총알이 되어 다른 위성을 위협한다. 지난 수년간 우리를 괴롭혔던 코로나 바이러스는 단 한 명의 최초 확진자에서 시작됐다. 우주 쓰레기 역시 필연적으로 많아질 것이다. 상상해 보자. 수 억 개의 총알이 날아다니는 우주. 점진적으로 파괴되는 인공위성. 더 이상 로켓을 쏘아 올릴 수 없는 환경. 조금 오버하자면 우리는 지구에 갇히고 말 것이다.
위험성을 인지한 세계 각국은 부랴부랴 우주 쓰레기 처리를 위해 나서고 있다. 영국 서레이대 우주 센터는 대형 그물을 이용해 우주 쓰레기를 수집하는 실험을 진행했고, 유럽 우주국은 2025년 로봇팔이 탑재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우주 쓰레기를 포획할 계획이다. 미국 정부는 올해 10월, 지구 궤도에 우주 쓰레기를 방치한 미 위성방송사에게 벌금 15만 달러(약 2억 원)를 부과했다. 우주 쓰레기에 관련한 벌금으로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도 2027년까지 우주 쓰레기 포집 위성을 발사할 계획이다. 임무는 1992년 발사한 우리나라의 최초 위성 우리 별 1호를 지구로 귀환시키는 것. 이미 수명을 다해 우주쓰레기가 된 우리 별 1호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오는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는 우주쓰레기를 포착, 추적, 회수할 수 있는 기술을 완성하게 된다. 그 이후엔 더 많은 우주쓰레기들을 수거해 지구 대기로 떨어트려 불태워 버릴 계획이다. 나로호라는 자체 로켓 기술을 가진 우주 강국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멋진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쌓인 수많은 우주 쓰레기와 앞으로 쌓일 잔해들을 모두 치우는데 지금의 방안들은 역부족이다. 기름 유출 사고로 해안가에 떠밀려온 기름을 수많은 사람들이 닦아 내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거대한 재앙에 맞서는 사람들은 물론 훌륭했지만 재앙을 막기엔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다. 넋 놓고 보고 있지는 않으니까. 결국 조금씩 해결해 나갈 테니까. 불현듯 다가온 불행에 맞서기로 시작했다는 사실은 어쨌든 의미가 있다.
다행히도 나의 닭가슴살 식단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닭가슴살을 먹으면서 삼겹살도 먹는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지만 괜찮다. 때로는 식단이 엉망이라는 과정보다 식단을 시작했다는 결과가 정신 건강에 이롭다. PT선생님은 극대노하겠지만 의사 선생님은 반가워하지 않을까? 서른 중반의 청년은 매 순간 ‘아, 살 빼야지’하고 다짐하는 친누이 같은 아저씨가 되었다. 운동의 질 보다는 헬스장에 출석했다는 사실에 뿌듯하고, 오늘 총 몇 칼로리를 먹었는지 보다는 그중 한 끼가 닭가슴살이었다는데 만족한다. 역시 인생에 완벽한 계획 같은 건 별로 없다. 무엇 하나에라도 행복함을 느끼니 괜찮은 삶인 걸까? 좀체 실망하거나 기죽지 않는 성격이 되어버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닭가슴살과 삼겹살 구매 버튼을 동시에 누른다. 우주 쓰레기도, 내 뱃살도 언젠간 사라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