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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May 02. 2024

비상시 양말, 평상시 <코스모스>

맥시멀리스트의 우주 보기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다 읽지 못했다. 이 책은 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며 우주를 바라보는 칼 세이건의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천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 책을 거의 성경처럼 여겨, 경건한 마음으로 책장 한켠에 모셔 두곤 한다.

 내 책장에도 <코스모스>는 꽂혀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도통 반 이상 읽어지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하필 웬만한 벽돌보다 두꺼웠고, 내 집중력은 하필 보잘것없이 초라했으며,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내 손을 책 반대편으로 던졌다. 게다가 천문학 강사라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데는 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두 시인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인 둘이 밥을 먹는 중 붉게 지는 노을을 보고 한 시인이 말했다. "석양이 참 아름답네요." 그러자 다른 시인이 대답했다. "거 밥 먹는데 일 얘기 하지 맙시다". 그러니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고 하는 독서를 <코스모스>로는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 고백하자면,  코스모스뿐만 아니라 요즘은 책을 통 읽지 않는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 어렸을 땐 옆돌기를 곧 잘했는데 어느 순간 옆돌기 능력이 사라진 것처럼, 책을 읽는 능력 자체가 소멸 돼버렸다. 혹 집중력이 문제인가 싶어서 최근 베스트셀러인 <도둑맞은 집중력>을 구매했지만 이 책 역시 읽지 못했다. 마치 그 무엇도 삼킬 수 없어서 병원을 찾았는데 처방으로 알약을 받은 느낌이랄까? 내 난독증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어제도 책을 샀다는 거다. 이번 달에만 벌써 세 권째다. 에세이 한 권과 천문학 관련 신간 두 권. 새 책이 도착하면 표지를 한 번 쳐다보고, 몇 페이지를 휘리릭 넘겨본 후, "재미있겠네, 내일 읽겠어" 하곤 책장에 꽂는다. 그뒤로 다시는 펴지 않는다. 이렇게 책장에서 명을 다한 책이 사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두 바퀴쯤 된다.

 그렇다고 설렁설렁한 마음으로 책을 사진 않는다. 헬스장을 등록할 때처럼 비장하다. 주 5일 헬스도 문제 없지, 하는 각오로 1년 회원권 끊듯이 책을 산다. 그러나 ‘헬스장 등록 후, 한 달 내에 71%가 운동을 그만둔다’는 통계처럼, 내 독서 생활도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임시대피소라 생각했던 책장은 어느새 책의 공동묘지가 되어버렸다.



아폴로 13호 임무의 지휘관 짐 로벨 ⓒNasa/Andy Saunders



Houston, We've had a problem.(휴스턴, 문제가 생겼다)


 1970년 4월, NASA 휴스턴 관제센터에 급박한 음성 무전이 도착했다. 아폴로 13호선의 사령선 조종사인 잭 스위거트의 목소리였다. 관제 센터는 확인차 다시 말하라는 신호를 전송했다. 다시 날아든 목소리 역시 같았다. "아, 문제가 생겼다."

 달로 향하던 아폴로 13호 우주선에서 산소 탱크 하나가 폭발한 것이었다. 이 폭발로 우주선의 전력 공급과 생명 유지 시스템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특히 이산화탄소 제거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우주 비행사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아폴로 13호의 임무는 달 탐사에서 생존으로 즉각 변경되었다.

우주비행사들과 지상의 관제센터는 즉각적으로 대처해야 했다. 우주선 내 쌓이는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것이 시급했다. 이산화탄소 수치가 치명적 수준에 도달하면 우주비행사들은 의식을 잃고 결국 사망하게 된다. 생명을 구할 유일한 방법은 달 착륙선에 있는 이산화탄소 세정기를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두 시스템의 연결 규격이 달랐다. 하나는 원형이고 다른 하나는 사각형이었다.


 우주인들과 관제센터는 두 시스템을 연결하기 위해 쓸만한 재료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이미 우주로 떠난 우주선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는 한정적이었다. 우주복에서 호스를 떼어냈다. 비닐봉지와 책자의 표지, 덕테이프도 동원되었다. 우주인들은 호스를 이용해 원형과 사각형 필터 사이에 연결 통로를 만들었고, 비닐봉지로 추가 밀봉을 강화했다. 덕테이프로는 모든 것을 견고하게 고정시켰지만, 아직 미세한 틈이 남아 있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양말이었다. 양말을 끼워 틈새를 완벽하게 막은 후 우주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이산화탄소 여과 장치가 작동하자마자 우주선 내의 이산화탄소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주비행사들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고, 결국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성공한 실패'의 전형적인 예로 남았다.



 주인의 모자란 판단력으로 구매된 내 책들은, 본래 태어난 목적과 다르게 살고 있다. 서랍장 높이를 맞추고 있는 소설책 A, 필요할 때마다 사라지는 냄비 받침대를 대체하는 요리책 B, 그리고 도둑이 들면 제일 먼저 집어들 무기 <코스모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주인들의 목숨을 살린 건 발을 덮는 대신 호스 틈새를 막았던 양말이었다. 비상용 무기가 된 <코스모스>도 언젠가 나의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레 겁먹고 못사고 있는 특수 무기도 당당하게 살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던가, <안나 카레니나>라던가.

 물론, 양말은 발을 따뜻하게 해 줄 때가 가장 편안하다. 아폴로 13호의 물건들도 본래의 용도로 사용될 때 가장 가치가 있다. 비상 상황보다는 평범한 일상이 더 낫다. 내 책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부수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어서 주인으로서 만족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읽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날이 오면, 글을 쓰면서도 글을 읽지 않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조금은 가셔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우주인들도, 책장에 숨어 있는 냄비 받침도 모두 평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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