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의 우주 보기
"뭐? 아직도 개기일식을 못 봤다고?"
나는 이미 상훈에게 91번쯤 으스댔지만, 상훈을 다시 만나자마자 92번째 으스댐을 시작했다. 그는 분개하며 말했다.
"아니, 나도 70% 가려진 부분 일식은 봤다니까!"
"개기일식이랑 부분일식이랑 급이 같냐. 이번에 미국에서 개기일식 있잖아, 나 예약했어. 안 갈 거야?"
"하, 돈 없다고..."
일식은 태양이 달에 가려지는 천문 현상이다. 낮에 달이 슬그머니 해 앞을 가로지르면, 그림자가 천천히 땅을 덮다가 완전히 해를 가리는 순간, 주위는 깜깜한 밤처럼 변한다. 이 짜릿한 순간을 개기일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개기일식을 경험하는 일은 땅속에 묻혀있는 보물 상자를 찾아내는 일과 유사하다. 보물 상자가 묻힌 깊이의 70%를 파든 90%를 파든, 결국 100%에 도달하지 않으면 아예 파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마찬가지로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지 않으면 개기일식의 느낌을 전혀 알 수 없다. 개기일식과 부분일식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현상인 것이다.
상훈은 개기일식도 못 봤냐는 나의 놀림을 받을 때마다 전력을 다해 반격했다.
"넌 혜성 꼬리 맨눈으로 본 적 있어?"
"혜성 봤지, 맨눈으로는 못 봤지만"
"우캬캬캬, 혜성 꼬리를 보면 진짜 하늘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다니까?"
"너 설마 혜성 꼬리를 개기일식과 비교하는 거야?"
"..., 아니 그럼 너 애리조나에서 은하수 본 적 있냐고!"
"너 설마 은하수를 개기일식과 비교하는 거야?"
"..."
개기일식은 천문인들에게 끝판왕이다. 마치 낚시인에겐 긴꼬리벵에돔, 등산가에겐 에베레스트과 같은게 개기일식이다. 더구나 지난 170년간 우리나라에서는 개기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귀신이나 좀비 정도를 제외하면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개기일식을 본 사람은 없다.
더욱이 개기일식은 1-2년에 한 번, 지구상에서 아주 좁은 지역에서만 발생한다. 지구의 70%가 바다이고, 나머지 20%가 산이나 극지방인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장소에서 개기일식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드물다. 설사 시간과 돈을 들여 개기일식 장소에 갔더라도 날씨가 흐리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교통, 시간, 날씨 모두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야만 그 놀라운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천문학을 전공한 상훈과 나는 제 포켓몬 카드가 더 멋지다고 으스대는 초딩처럼 늘 밤하늘 경험을 겨뤄댔다. 상훈이 혜성의 꼬리를 봤냐고 공격하면 나는 영하 40도를 견디면서 본 오로라로 방어했고, 애리조나 은하수로 필살기를 쓸 때면 하와이 마우나케아 은하수로 결계를 쳤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느라 시간을 더 쓴 상훈보다야 천문대에 일찌감치 입사해 월급을 여행에 갖다 바친 내가 경험이 더 많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경험마저 부족하다면 숫자 대신 껍데기만 남은 내 통장이 나를 해임하기 위해 주주총회를 열지도 모른다.'아니, 돈을 그만큼 쏳아붓고도 경험에 우선권이 없다고요? 정말 형편없는 대표군요. 통장의 경영권에서 물러나세요'.
"나도 예약했다. 개기일식 보러 미국 가고 만다!"
상훈은 2024년 미국 댈러스에서 펼쳐질 개기일식을 두 달 남겨두고 갑작스레 미국행 비행기를 끊었다고 했다. 세계의 유가가 하늘을 찌른탓에 비행기 가격도 고공행진 중이었는데, 무려 200만 원을 주고 항공권을 끊은 것이다. 나는 그의 충동적인 결정을 보며 물었다.
"숙소는 예약했어?"
"이제 해야지..."
"렌터카는?"
"그것도 해야지..."
"지금 미국 달러 비싼 거 알지?"
"그래도 가야지"
나는 '그래, 우리가 시간이 없지 돈이 없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돈도 시간도 없었다. 눈치를 보며 연차를 쓰고 궁지에 몰리며 카드를 긁는 여행이었다. 상훈은 계좌와 작별을 고할 작정이 분명했다. 한 순간의 결정으로 500만 원을 태운 상훈은 계좌와 함께 재가 되어 스러졌다.
그리고 2024년, 우리는 미국에서 개기일식을 목격했다.
거리는 적막했고, 하늘에 있는 검은 구멍은 온 세상을 집어먹을 것처럼 위협했다. 달에 가려진 태양이었다. 검은 태양은 성을 내듯 흰색 코로나를 주위로 내뿜었고, 낮이 밤으로 변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밤이 된 줄 착각한 센서등만이 공포 영화처럼 '두두둑' 켜졌다. 한여름에 찬 바람이 불었다. 낮이자 밤인 하늘엔 밝은 별들이 깜빡였다. '세상이 절멸하는 것일까' 하는 공포감이 주변을 맴돌았다. 두 번째 보는 개기일식이지만 처음처럼 느껴졌다. 처음처럼 경이로웠고, 처음처럼 충격적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개기일식을 볼지 모르지만, 개기일식은 항상 처음처럼 느껴질 것이다.
2017년에 개기일식을 경험한 후 나는 상훈에게 줄곧 말해왔다. "내 인생에서 가장 경이로운 장면이 개기일식이더라.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지. 일식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
"돈 쓴 보람 있더라"
상훈은 개기일식을 보고 난 후 말했다. 치솟은 환율과, 갑작스레 안 좋아진 날씨에 예약해 둔 숙소를 버리고 새 숙소를 잡느라 이미 말라비틀어진 지갑을 더욱 쥐어짰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황홀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했다. 암, 돈 쓴 보람있고 말고.
나는 맥시멀리스트다. 커피 머신과 모카포트를 동시에 소유하고, 일터에서는 윈도우 노트북을, 집에서는 맥북을 사용한다. 지속적으로 버리고 최소한만 소유하려는 미니멀리스와는 정 반대다. 무언가를 구매하고 소비하는 순간, 나는 찌릿한 희열을 느낀다. 소비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신선한 경험을 위해 주저 없이 지갑을 여는 것이라고 뻔뻔하게 핑계를 대본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머리도 한 움큼씩 빠지는 주제에 '틀린 말이 없다'는 옛말도 외쳐본다.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됩니다!
나는 매년 돈을 쌓아가는 대신 구매하고, 여행하고, 먹으며 소비하는 삶을 선택했다. 통장 잔고는 늘지 않지만 경험은 계속 증가한다. 덕분에 상훈에게 '개기일식 봤어?'대신 '개기일식을 한 번 밖에 못 봤어?'라고 놀릴 수 있다. 놀림이라는 얕은 행복으로도 삶은 촉촉해진다. 인생을 팍팍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가끔은 돈으로 부드러운 행복을 사는 것도 괜찮지 싶다. 부자가 되긴 글러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