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문 잡지 지리(知日)
“부수지 마세요. 일본 차이지만 중국산입니다.”
2012년 베이징 내에서 일본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스티커를 차 뒤에 부착하고 다녔다. 우리나라 독도 분쟁과 유사한 댜오위다오(钓鱼岛, 일본명 센카쿠열도(尖閣列島)) 영토 분쟁이 심화되면서 중국 내의 반일 감정이 최고조에 이른 탓이었다. 길거리에 유독 부서진 일본 차들이 많이 보였던 기억이 난다. 일본 차를 타는 사람들은 웃지 못할 문구의 스티커들을 붙이는 것으로 심적 부담의 차선책을 찾았다. 베이징에 갈 때마다 자주 들르던 일본계 백화점은 일본어가 함께 쓰인 간판을 큰 천으로 가리고서야 영업을 재개했고 일본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한국인이라고 거짓말을 할 정도였다. 알고 지내던 한국인 PD는 하필 일본 전통 바지를 입고 슈퍼에 가는 바람에 생면부지 중국인에게 뒤통수를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반일 감정이 베이징을 휘감던 무렵‘지리(知日)’라는 제호의 아주 이상한 잡지가 서점에 등장했다. ‘일본을 알자’라니. 알고 있는 일본마저도 숨겨야 할 것 같던 당시의 상황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 잡지는 간결한 레이아웃과 흥미로운 원 테마 기획으로 시선을 끌었다. 무사, 고양이, 유니폼, 요괴, 폭주족 등 평소 중국 잡지계에서는 보기 드문 테마 선정과 편집디자인으로 베이징에 갈 때마다 보물을 캐듯 밀린 과월호 잡지들을 샀다. 광고 한 페이지 없이 한 가지 테마를 잡아 실험적인 기획과 디자인을 했던TTL MAGAZINE 시절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도대체 누가 만드는 잡지일까? 음,반일 감정을 어떻게 좀 풀어보려는 일본인의 전략일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해있는 중국인들에게 과연 이런 잡지가 팔리기는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잡지는 트렌드에 민감한2~30대 젊은 중국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매호 높은 판매 부수를 기록하고 있다(그중 고양이 테마는12만 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지리>는 일본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중국인 쑤징(苏静) 편집장과 베이징대를 졸업하고25살에 일본으로 넘어가 지금껏 일본에 거주하는 고베대학 교수 마오딴칭(毛丹青) 주필이 함께 만든 잡지다. 쑤징 편집장은 중국 유명 출판사에서 베스트셀러를 기획한 편집자 출신으로 반일감정이 팽배해짐과 동시에 젊은이와 지식층 사이에서 일본을 향한 지적 호기심이 커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일본 문화에 관한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81년생인 그 역시 일본 영화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즐겨 읽는, 역사에서 조금 비껴난 세대였다. 마오딴칭 주필은 ‘중국인이 중국인을 위해 리포트하는 일본 문화’라는 잡지 컨셉에 동의했고 정치적인 이슈에 좌우되지 않는 젊은 중국인들에게 일본 문화의 면면을 지속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그간 단행본 형식의 일본 소개 책들은 꽤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일본 문화를 다루는 매체는 드물었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를 감안할 때 정기적인 잡지 발행에도 소재가 고갈되지 않을 거란 확신도 잡지 창간의 동력이 되었다. 결국, 2011년1월 작가 나라 요시토모를 테마로 한 창간호를 발행하게 되었고5년 넘게 흥미로운 주제들을 선정하며 판매 부수10만 부 이상을 기록하는 일본 전문 잡지로 성장했다. 한 가지 테마를 축으로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기사는 그간 정형화되어 있던 일본에 관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사진가 아라키 노부요시, 건축가 안도 타다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만화가 이노우에 다케히코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일본 문화계 인사들의 인터뷰도 척척 지면에 내놓았다. 잡지의 인기에 힘입어 중국SNS 웨이보 공식 계정 팔로워 수는 이미48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쓰징 편집장은 2015년 가을, 또 다른 일을 펼쳤다. 지중(知中)이라는 잡지를 창간한 것. 베이징의 번화가 왕푸징 애플 스토어에서 진행된 지중 창간 기념 행사에는 힙하다는 중국 젊은이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일본의 문화와 성향을 관찰하던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다. ‘중국을 젊은 감각으로 소개하는 책이 드디어 나왔다’며 중국 언론에서도 한동안 이슈가 되었다. 어느 각도에서 어떤 깊이로 조명하느냐에 따라 그 색을 달리할 만큼 중국은 확실히 입체적인 나라다. 새로운 시선을 가진 젊은 중국은 그들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풀어낼까.
2008년 중국에 처음 갔을 때 ‘중국인들과 친해지려면 일본 이야기를 시작하면 된다’라는 조언(?)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농담처럼 들리는 이 말에는 사실 동아시아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중국은 청일전쟁, 21개조 조약(5.4운동), 만주사변, 중일전쟁, 난징 대학살 등 일본에게 수많은 화를 겪으며 근‧현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공유하는 역사의 아픈 상처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와 미래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영향을 받으며 변화한다. 젊은 중국은 ‘취향’이라는 것을 매개로 일본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자국 내에서 친일, 역사적 인식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제대로 알아보자’는 그 시작점으로5년 넘게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은 아카이빙보다는 즉흥성에 더 익숙해 있던 젊은 중국이 사뭇 진지하게, 하지만 다채롭게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는 것’은 중요하다. ‘제대로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미루어짐작한 가치 판단은 오류를 범하기 쉬울 뿐 아니라 진정한 모습을 볼 기회마저 뺏는다. ‘알고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게으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과연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모습은 그 실경과 얼마만큼 닿아 있을까. 선입견을 걷어낸 중국의 맨 얼굴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중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 위로 자꾸만 이러한 것들이 겹쳐진다.
단행본 <베이징 도큐멘트>
글 김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