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 24]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겨온 작품이다. 연출을 맡은 팀 밀란츠 감독은 BBC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2016)의 세 번째 시즌을 맡으며 시리즈의 중심인물이었던 배우 킬리언 머피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두 사람은 더블린에 위치한 킬리언 머피의 자택에서 작품화할 수 있는 여러 소재에 대해 의견을 나눴고, 배우가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이번 작품에서 킬리언 머피는 제작과 주연을 맡았다.
이 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막달레나 세탁소,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아일랜드 가톨릭 수녀원이 정부의 협조와 묵인 아래 운영하며 불법적인 행위를 일삼아 왔던 공간 또한 그대로 옮겨졌다. 이혼과 피임이 금지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권력화된 종교의 민낯 또한 함께다.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현실을 마주한 한 인물의 내적 고통과 슬픔이 오롯이 그려지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처음부터 주어지는 몇 개의 신을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장면 하나. 부모에 의해 한 소녀가 마을의 수녀원에 강제적으로 입소 당하는 장면을 빌(킬리언 머피 분)이 지켜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일인칭과 삼인칭을 오가며 몇 번의 시점 변화를 시도하고, 해당 상황의 가혹한 현실과 인물의 참담한 마음을 이어낸다. 이 남성이 어떤 내면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보여주고자 완성된 장면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빌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레이어(석탄 창고) 바깥으로 나서지 않는다.
장면 둘. 회사 트럭을 이끌고 수녀원을 빠져나와 돌아오는 길 위에서 디어머드라는 이름의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는 곧 트럭을 멈추고 문을 열고 내려 땔감을 주우러 나왔다는 소년의 상태를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잔돈 몇 개를 꺼내 건넨다.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이미 알았던 터다. 이번에는 레이어(트럭)의 문을 열고 나와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두 장면에서 반복되지만 다른 행동을 보이며 오버랩되는 지점이 있다. 이곳이 영화가 서두에서부터 관객에게 던지고자 하는 화두이자 빌이라는 중심인물을 정확히 보여주는 자리가 된다. 하나의 공간 안에 놓인 인물이 자신이 속하지 않은 바깥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또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이제 영화는 이 문제를 자신의 품 안에 담아둔 채로, 한 인물의 세상을 옥죄어가기 시작한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지 지켜보기 위해서. 또 자신의 안온한 자리를 어떻게 깨뜨리고 나아가는지 지켜보기 위해서. 영웅의 서사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은 의문이 안 들어?”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는 장면을 목격한 날, 빌은 집으로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내 아일린(아이린 월시 분)의 대사를 유추해 보면 그가 불면을 이룬 날은 꽤 오래 지속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동안 비슷한 방식으로 입소 당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 왔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을 카메라가 곧 확인시켜 주지만, 바로 직전까지 빌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 이 영화가 가진 말하고자 하는 화두의 무게가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놓인 레이어를 깨고 나아가지 못하는 빌의 모습 또한 여기에 있다.
인물을 추동(推動)하기 위해 영화는 세 번의 순간을 마련한다. (정확히는 네 번이다. 쉬운 설명을 위해 마지막 두 번의 지점을 하나로 묶는다.) 처음은 이 글의 시작에서 이야기했던 장면이다. 세라(자라 데블린 분)라는 이름의 소녀가 부모의 손에 이끌려 수녀원에 감금되던 날의 이야기. 그다음은 비용을 청구하기 위해 수녀원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때다. 알 수 없는 갓난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지고, 한 여성이 갑자기 뛰쳐나와 제발 자신을 데리고 나가달라며 울부짖는다. 곧 나타난 수녀는 고압적인 태도로 상황을 정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석탄 창고에 홀로 갇힌 채 밤을 보낸 세라를 다시 마주하던 때다. 그때마다 빌은 조금씩 더 가까워진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의 경계에.
그때마다 등장하는 것이 하나 있다. 분절된 상태로 영화 곳곳에 놓여 있는 어린 시절 빌의 기억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윌슨 부인(미첼 페어리 분)의 저택에서 자라온 그는 그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일종의 트라우마를 경험한다. 현실의 부정적인 경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무력함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어린 시절의 모습 속에서도 자신이 머물고 있는 레이어(창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빌이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세계를 어떻게 마주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어둡고도 짙은 물음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결정된 처음의 선택은 대개 한 사람의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법이다.
“당신이 문제를 일으키면 아이들만 학교를 다니기 힘들어져.”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현실의 무게다. 극 중 아일린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는 자신과 가족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모른 척해야 하는 일이 있다. 작은 소문이라도 금방 퍼져버리는 이 작고 좁은 마을에서 사람들과 척을 지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심지어 빌은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석탄을 판매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다섯 아이를 부족함 없이 키울 만큼 경제적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다. 반면, 수녀원의 수녀들은 마을의 거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을 정도로 센 입김을 갖고 있다. 실제로 수녀원장 메리(에밀리 왓슨 분)는 빌의 딸들이 다니게 될 학교의 입학 문제까지 운운하며 겁박해 온다. 석탄 창고에 가둬놓은 세라를 빌이 발견하면서부터다.
앞서 이야기했던 세 번의 순간 중 마지막에 해당되는 자리의 이야기를 꺼내야 할 차례다. 출산일이 5개월도 남지 않은 세라는 석탄 창고에 갇혀 있다 빌을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아이를 낳으라는 것이었다. 태어난 아이는 좋은 집에 입양을 보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녀원장은 자신의 치부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부터 한다. 강압과 순응의 반복이다. 이때 수녀원에 들어온 빌이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수많은 소녀들에 의해 새벽부터 공장처럼 운영되고 있는 수녀원 내부의 모습이다. 그동안의 의구심과 모두가 함께 모른 척해왔던 마을의 어두운 진실을 빌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면모를 회복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를 움직이게 한 주요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소녀 개인에 대한 측은한 마음일 수도 있고, 개인의 불행을 더 이상 반복하게 둘 수 없다는 정의로움일 수도 있고, 자신의 입을 막기 위해 건넨 편지(를 가장한 돈)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비참함일 수도 있다. 딸들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단 한 번도 넘을 수 없었던 경계와도 같던 문턱을 넘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이 분명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빌의 유일한 미소 하나가 그 자리에 있다.
일과가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온 빌은 석탄 가루로 인해 검게 물든 두 손을 솔로 문질러 깨끗이 씻는다.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일과의 한 과정에 가깝다. 그의 목뒤에도 내려앉은 석탄이 그대로 남아있지만, 영화는 언제나 세면대의 뜨거운 물 아래로 뒤섞이는 더러움과 조금씩 제 색을 되찾아가는 손의 살성을 화면 속에 담아낸다. 다시, 그는 거대한 무엇을 찾거나 따르고자 하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작고 여리고 미약한 존재에 가깝다. 그래서 언제나 고뇌하고 슬퍼한다. 자신의 세수(洗手)라는 행위에 의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모두 지나간 기억 하나에도 두려워하던 그가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에 손을 뻗는 모습은 그래서 울림이 있다. 영화가 빌의 표정 뒤로 더 이상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킬리언 머피의 잔상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