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지만, 어떤 죽음은 애달프다. 부모가 없는 집에서 홀로 끼니를 해결하다가 화마를 피하지 못한 아이의 죽음이, 음주운전 차량에 치인 성실한 가장의 죽음이,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의 죽음이 그렇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고, 그 죽음이 일찍 찾아온 것뿐이라는 말로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죽음들이다.
특히, 불의의 사고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니. 한 인간이 자살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애달프고, 그가 남기고 간 시간들이 서럽다. 그래, 인생이 이렇게 몰인정하고 잔인했었지를 새삼 깨닫는다. 여기에 사는 게 다 그렇지,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있는 법인데, 왜 그걸 이겨내지 못했냐-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생전에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우리를 탓해야지.
보면 '착한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데 어려움이 많다. 좀 더 어렸을 때 나는 '착하다'는 말을 싫어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설명하는 수식어로 흔하게 '착하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거기에 엄청난 반감을 느꼈다. '착하다'의 기준이 무엇이지? 누가 착한 사람들이지? 누구에게 착한 사람들인가!! 적어도 나에겐 '착하다'는 '개성 없음'이나 '자기 몫을 잘 챙기지 못하는'과 동의어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드러낼 특별한 무언가가 없는 사람들을, 또는 타인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착한'사람들이라고 불린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인 몇몇 사람들이 누군가를 자기의 구미에 맞게 누군가를 이용하기 위해 '착하다'라는 허울뿐인 말을 이용하는 거라고.
하지만 언제부턴가 생각이 바뀌었다. 나이가 들고,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군상이 존재하며, 동일한 상황일지라도 사람들의 생각과 그에 대한 대처 방법 역시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구나. 저렇게 뻔뻔하게 행동할 수도 있는 거구나. 약속은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구나. 모두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유치원에서 배웠을 법한 예의와 에티켓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덕이나 윤리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는 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무심한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래서 말 한마디라도 조심스럽게 골라서 하는 사람, 그래도 혹시 누군가가 자신으로 인해 아팠다면, 거기에 미안해할 줄 아는 이가 '착한 사람'이다. 그들은 타인의 아픔을 소비하지 않는다. 인생을 사는 데 있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시련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끔은 힘들다. 세상이 변덕을 부릴 때면,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냐- 푸념도 해보고, 세상이란 놈한테 욕도 해주고, 그게 왜 내 잘못이냐고- 남 탓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착한'사람들은 그걸 못한다. 눈치껏 모른 채도 하고, 아닌 척도 해야 하는데, 그런 재주가 없다.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서 그러면 누가 알아준다고. 실속 없는 사람이라고 핀잔만 듣지. 그래도 남이 아픈 것보단 자기가 불편한 것이 마음이 편해서 모든 것을 자기가 끌어안는다. 그러니, 슬플 밖에.
누군가는 그들의 약함을 탓할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전투력이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라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움직이는 건 '착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들의 배려가 윤활유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삐걱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맞물릴 수 있도록 기름칠을 한다. 사람들의 네모난 마음이 뾰족한 모서리로 서로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그래서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의 그림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마도 이들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진작에 멈춰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탓하며 미워하고만 있었겠지. 이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는 착한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 착한 사람들이 덜 슬프도록, 그들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