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 사이는 천륜으로 이어져 있어 끊을 수 없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절망했다. 내가 아무리 싫어하고 없는 셈 치려고 해도 친부모는 친부모였다.
내 친구 중 한 명이 나랑 상황이 비슷하다. 그 얘는 여자애라서 차별받진 않았지만 '첫째'라서 차별을 받았다. 친구의 부모님도 나의 부모님과 다르지 않았다. 거의 똑같았다. 상처받게 만드는 막말도 레퍼토리가 비슷할 정도로...... 친구의 부모님도 끊임없이 비교하신다. 그리고 칭찬은 없다. 잘하는 건 당연한 거고, 못하는 거는 못하는 거였다. 둘 다 서울로 대학은 함께 올라왔지만 아직까지 부모님과 연락은 제대로 못 끊고 있다.
당한 만큼 당했고, 질릴 만큼 질렸지만 도망치지 못했다. 여태 도망칠 용기도 없었지만 도망치고 나서의 미래가 무서웠다.
지금도 부모님한테 이렇게 당했다고 말하면 열이면 아홉은
"심하긴 하셨지만 그래도 잘 되라고 하신 소리지."
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내가 도저히 너무 심해서 못 견뎌서 정말 연락을 끊고 싶다라고 말하면
"그래도 부모님인데......"
'부모가 부모다워야지.'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오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한다. 그러는 순간 나는 패륜아가 돼버리고 아유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밀어도 난 부모에게 폭력을 쓴 패륜아일 뿐이었다.
연락을 끊고 잠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랑 함께 찾아봤지만 대한민국에선 친부모에게 도망치기란 너무 어려웠다. 전입 신고하는 순간 친부모는 내가 어디서 사는 지 알아볼 수 있다. 전입신고를 하지 못하면 확정일자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보증금이 큰 금액의 집은 구할 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전입신고를 안 한다고 쳐도 혼인신고하면 그 순간 다시 주소를 알 수 있게 된다. 주소를 부모가 알지 못하도록 본인 외 열람 금지하는 것을 신청하려면 가정폭력으로 폭행을 당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소송을 걸어야 한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부모라서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건 포기해야 한다. 부모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적당히 둘러대며 아무렇지 않은 척 흘려보낼 수 있지만 연애에서는 다르다. 더더욱 결혼할 때라면 이 이유 때문에 나는 다시 그들과 연락을 해야 할 수도 있고, 내가 원치 않아도 연락을 받을 수 있고, 그 사람과 헤어질 수 있다. 그걸 이해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다시 그 이유를 이유 해주는 부모님을 만나는 건 너무 낮은 확률이었다.
포기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남들만큼 행복하게 살기 위해 천륜을 끊어내고 싶었지만 그 순간 남들만큼 행복할 확률은 떨어졌다.
그것들 마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희망까지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마저 포기하면 내가 힘겹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그저 '천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난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더이상 포기할 것도 없지만 남은 것도 포기할 용기가 필요했다.
나에겐 아직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