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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눌산 Sep 18. 2015

가을 아침

자연에도 질서가 있다



간밤에 비라도 내린 듯 나무 데크 위로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가을 아침은 언제나 촉촉하다. 10월로 접어들면서 적상산 너머로 해가 올라오는 시간이 점점 게을러진다. 더불어 산촌의 아침은 한 박자 더디게 시작한다. 기상시간 역시 계절을 따라 간다. 봄부터 점점 빨라지다 가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다시 느려진다. 해 뜨는 시간과 비슷한 보조를 맞추는 셈이다. 알람이 따로 필요 없는,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기상시간 역시 비슷하다. 요즘은 막바지 수확철이라 분주하게 아침을 맞는다는 것만 다를 뿐, 시작은 언제나 아침해와 함께다. 분초를 다투는 도시 생활에 비해 산촌의 아침은 여유가 있다. 해 뜨는 시간에 맞춰 일어나고, 해지는 시간에 맞춰 하루 일과를 마감하니까. 굳이 시계가 없어도 된다.



산촌의 아침 빛은 찬란하다. 뒤란의 520년 된 당산나무 꼭대기에서부터 서서히 아래로 햇살이 스며든다. 일출 후  1시간쯤 지나면 당산나무는 하나의 거대한 불기둥으로 변한다. 가을 옷으로 갈아입은 느티나무는 눈부신 아침햇살에 다급해진다. 이파리를 하나 둘 떨구며 겨울채비를 한다. 붉게 물든 이파리는 하루가 다르게 바람에 날려 뒤란 가득 쌓인다. 낙엽이 쌓이는 만큼 가을의 깊이는 더해간다.


가장 먼저 단풍이 드는 나무는 어디서든 흔히 만날 수 있는 벚나무다. 사람도 다 성격이 다르듯 나무 역시 제각각이다. 이른 봄 새잎이 돋는 순서가 다 다르고, 가을엔 단풍이 물드는 순서가 다 다르다. 이미 정해진 순리다. 때때로 지구온난화니 기상이변이니 하는 변수가 생겨 뒤죽박죽 되긴 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뿐, 분명한 것은 자연에도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벚나무 외에 옻나무와 붉나무 종류도 성질 급한 축에 낀다. 산길 걷다 보면 흔히 만나는, 유독 붉은 녀석들이 있다면 바로 옻나무나 붉나무가 틀림없다. 벚나무는 사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다. 이른 봄 잎이 돋기 전 벚꽃을 피우고 이내 꽃비를 뿌린다. 이어서 연둣빛 세상이 펼쳐지고, 가을이면 어지간한 나무를 앞질로 울긋불긋 단풍 물을 들인다.



사방으로 둘러쳐진 산자락은 아직 가을빛인데 티브이에서는 무지 추울 거라고 떠들어댄다. 비바람이 불고 기온차가 무려 17도나 나는 지역도 있으니 대비하라는 얘기렸다. 펜션 주인에게 일기예보는 민감하다. 특히 손님이 몰리는 주말이라면 더 그렇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준비할 일도 많고 문의전화에 답변도 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나만의 분석력이 생겼다.


무주는 중부도 남부도 아니다.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동서남북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애매모호한 지리적 환경인 것. 그래서 동 단위 예보와 함께 중부와 남부지방 일기예보를 종합해 분석해보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이따금 얼토당토 않은 일기예보를 보고 예약을 취소하는 전화가 온다. 뉴스에서 남부지방에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보고 취소를 하는 것인데, 무주는 당연히 남부지방일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사정이 있어 취소하려고요.”

“비 때문이시죠?”

“아, 네. 아무래도....”

“무주는 남부지방이 아니거든요. 제가 본 예보에는 비 소식이 없습니다.”

“.....”


펜션 초창기에는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였다.  취소하려는 마음을 돌려 놓고 싶은 생각에서. 하지만 요즘은 곧바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한 후 “계좌번호 알려주시면 곧바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로  마무리한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어렵게 시간을 내서 하는 여행이라면 비는 불청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비 온다고 여행 계획 취소하는 사람이다. 비 온다고 밥 안 먹지는 않잖아. 뭐 이런 생각. 여행이라면 모름지기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나름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들어간 시골 다방에서 뜻밖의 호의와 정을 느꼈던, 낙동강 도보여행 때 생각이 난다. 나이 지긋한 다방 마담은 큰 배낭을 둘러 맨 낯선 여행자에게 시키지도 않은 계란 프라이와 보기에도 정성이 가득 담긴 쌍화차 한잔을, 그냥 얻어 마신 적이 있다. 아마도 긴 여행 길에 작은 힘이라도 되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받으면, 주는 방법을 알게 된다. 낯선 이에게 작은 호의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기도 한다.


"100mm는 와야 되는데.... “


아랫동네 임씨 아저씨 얘기다. 땅이 너무 메말라 산에 가봐야 허탕이라는 얘기인데 농사를 짓지 않는 아저씨는 가을이면 송이와 능이버섯을 따러 온 산을 뒤지고 다닌다. 웬만한 산은 훤히 꿰뚫고 있을 정도로 근처에서는 알아주는 산꾼이다.


“날이 너무 가물어서 버섯이 안 나와. 내일 한 3~40mm 온다던데 그 양으로는 턱도 없지...”


오로지 하늘에서 직접 떨어지는 빗물에만 의존하여 벼를 재배하는 논을 천수답(天水畓)이라고 한다. 요즘 세상에 그런 천수답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지만, 아저씨는 여전히 하늘의 뜻에 맞기는 천수답을 짓고 있다.


주말인 내일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단다. 덕분에, 오늘 아침을 마지막으로 예약 손님이 모두 다 취소됐다. 이불빨래를 하고 서늘한 밤공기를 덮여 줄 모닥불용 장작까지 다 준비해놨는데, 허망하긴 하지만 이번 주말은 나도 한갓지게 단풍구경이나 해야겠다.





2008년 5월. 뜬금없이, 서창마을 황토펜션 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펜션 주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여행자로 여전히 서창마을에 살고 있다.

이 글은 그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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