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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눌산 Sep 04. 2015

오늘은 서창마을 자두 따는 날

자두가 원래 그렇게  맛있었나?

우리 마을은 김(金)씨 집성촌이다. 여섯 가구 중 우리 집만 빼고는 모두 한 집안으로 그 중심에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300년 된 고가가 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 낡고 허름해 보이지만, 이따끔 집안 장손이 드나들며 관리를 한다. 아쉽게도 슬레이트 지붕이어서 그렇지 기와지붕이었다면 꽤 근사해 보였을 것이다. 집주인은 대전에 살면서 거의 매일 온다. 처음엔 마을 주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농사를 짓기 위해 대전과 무주를 오가는 그 집안 장손이었다. 


그동안 빈집으로만 알고 있어 들어가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마침 사람이 있어 집구경을 했다.  두어 번 안면이 있는 분이라 서로 인사를 나눈다.




"마을 펜션 공사를 할 때 배관 공사를 내가 했는데.... 동네가 너무 조용하죠? 전에 언젠가 건강이 좋지 않은 분이 살고 싶다고 해서 빈집을 얻어 좀 있었는데, 한 달도 못 돼 너무 조용해서 무섭다고 가버렸어요. 산골이라 아무나 살긴 힘든데..."


"전에 살던 곳은  여기보다 더 외진 곳이라 괜찮습니다.  그래도 여긴 마을 분들이 몇 계셔서 사람 사는 동네 같아 좋은데요."


장손이 얘기한 의미를 이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한 시골마을을 동경하지만, 뭐든 일단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무작정 내려왔다가는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받으니까. 특히 귀촌을 목적으로 땅부터 사고 집을 짓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 맘에 드는 곳이 있으면 몇 번 드나들면서 주변 환경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다.


"이왕 온 김에 자두 따는 것도 좀 도와주고, 같이 점심이나 먹고 가요."


"아, 네. 집이 참 오래 돼 보이네요."


"300년 됐다고 해요.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인데, 그동안 살면서 여기저기 손본데가 많아서 원래 모습은 아닐 겁니다."


빈집 치고는 정갈하다. 토방 마루 또한 멀쩡하고. 어릴 적 문간방을 썼다는 장손은 지금도 가끔 그 방에서 잔단다. 사실, 이런 낡은 집을 갖고 싶었다. 오래 된 고가는 잘 수리하면 썩 괜찮은 집이 될 수 있으니까. 


고가를 지키는 거대한 자두나무 가지가 축 처졌다.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나무 전체가 붉은 색이다. 그동안 오가면서 군침만 흘렸는데, 오늘은 맛을 보겠네. 이런 경우 한 마을이지만,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 따 먹어서는 안된다. 인심이 박하다는 게 아니라,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따금 등산객들이 남의 집 두릅을 따거나, 허락 없이 풋고추 몇 개를 따다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경우를 종종 봤다. 주인 없는 것인 줄 알았다는 둥, 고추 몇 개 따는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냐는 둥 시골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들 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다 상대적이란 얘기다. 예를 들어 허락 없이 남의 밭에 들어가 고추 몇 개를 딴다고 해서 뭐 어떠냐 하겠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내 집에 허락 없이 누가 들어와 냉장고 문을 열고 고추 몇 개를 가져갔다고. 다를게 없다는 얘기다. 십 수년 동안 산촌에 살면서 느낀 점은 시골 인심은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무례한 몇몇 사람들 때문에 그런 말들이 나왔다는 얘기지. 혹 고추가 필요하면 주인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보라. "할머니 저 고추 몇 개만 따먹어도 될까요?"라고. 아니면, 갖고 있는 과자나 사탕, 음료수라도 먼저 권해보면, 분명 '이심전심'으로 서로 통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동안 산촌에 살면서도 농사는 짓지 않았다. 작은 텃밭 정도는 해봤지만, 며칠 씩 집을 비우는 일이 잦다보니 관리가 안돼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냉장고에는 제철 채소가 넘쳐 났다. 상추, 고추, 토마토, 깻잎 등 오가는 길에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면 "여기선 흔해도 사먹으려면 다  돈이야~"하시면서. 영동 새막골에 살 때는 아랫마을 할머니 덕에 참 잘 먹고 잘 살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손수 농사 지은 들깨로 짠 들기름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들기름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참기름 보다 더 고소했으니까. 산나물 숭숭 썰어 밥하고 비벼 먹으면 참 설명하기 힘든 기가 막힌 맛이었다. 대신 나는 가끔 농사일을 거들어 드리거나, 차가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장에 나가는 정도의 도움을 드리곤 했다. 언젠가는 파마를 하러 가신다기에 따라 나섰다 하루 종일 장터 미장원에서 놀았던 적이 있다. 무조건 오래간다는 2만 원짜리 파마를 하러 온 할머니들로 가득 찬 미장원에서는 작은 잔치가 벌어진다. 집에서 가져 묵은지에 돼지고기 뒷다리살을 넣은 김치찌개를 끓이고, 부추전이며 배추 겉절이가 뚝딱 만들어 나온다. 머리를 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에 점심도 먹고 간식까지 만들어 나누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영화 '집으로'에 등장하는 상촌장터였다.





집을 둘러보는 사이 토방 마루 위에 밥상이 차려졌다.  금방 밭에서 뜯어 온 상추에 장손이 직접 담갔다는 된장과 고추장, 그리고 파김치.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는 들기름 한병도 놓여 있다. 


"시골밥상이 이래요.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먹어요"


"무슨 말씀을..." 된장에 파김치 하나 얹어 상추쌈부터 맛 본다. 새막골 들기름  생각이나서 고추장에 들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쓱쓱 비벼서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상추에 얽힌 사연하나.

오지여행 회원들과 여행을 갔는데, 민박집 주인이  밭에 가서 상추를 뽑아오라는 말에 한 여자 회원이 진짜로 뿌리째 뽑아와 버렸다.  어이없어하던 민박집 아주머니의 표정이 지금도 생각난다. 다음날은 민박집 주인 도와드린다고 콩밭에 풀 뽑으라고 했더니 콩만 쏙쏙 뽑아버렸던 일도 있었다. 나 역시 호두나무를 보기 전까지는 땅에서 캐는 줄 알았으니까. 하얗게 페인트 칠한 야생 복분자 나무를 보고 펜션에 온 손님이 궁금해하길래, 농담으로 "산딸기 나문데 내가 찜해 논거예요"했더니 믿더구만 


자, 이제 밥 값은 하고 가야지.

대전에서 일 도와드린다고 장손과 함께 온 아주머니들과 자두를 딴다. 자루에 들어가는 것보다 입속으로 들어가는 게 더 많다. 사실, 자두는 신맛이 강해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무에서 직접 따서 먹는 자두 맛은 전혀 다르다. 풍부한 과즙과 신맛보다는 단맛이 더 강하다. 낙동강 도보여행 중에 밀양에서 마산으로 넘어가는 구간을 지나다 단감 밭에서 금방 딴 단감맛에 반해 택배로 주문해 먹기까지 했던, 그 단감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마트에서 사 먹는 맛 하고는 전혀 다른 맛으로, 그 후로는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되었다. 뭐든 산지에서 먹는 맛은 다르다는 얘기다.


오후 내내 자두를 땄다. 나무를 흔들어 따면 쉽지 했는데, 그러면 다 상처가 나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손으로 하나 하나 따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사다리가 동원되고. 심지어 매미채까지 갖고 나왔다. 


한나절 노동의 대가는 과분했다. 장손은 자두 한 자루에 보리수 열매까지 담아 준다. 자두는 펜션 손님들과 나눠 먹고, 보리수 열매는 뭐 할까 고민하다. 술 한병 담그고, 설탕과 버무려서 효소를 담갔다.





2008년 5월. 뜬금없이, 서창마을 황토펜션 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펜션 주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여행자로 여전히 서창마을에 살고 있다. 

이 글은 그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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