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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Nov 07. 2021

전단지의 기적

오늘 이야기할 사람을 소개하기 전에, 그에게 적당한 가명을 하나 붙여주는 게 좋겠다. 지나치게 부끄러움이 많은 친구라 실명을 거론했다간 무슨 질책을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에게 들을 질책이야 그리 무서운 게 아니지만, 그의 섬세하고 연약한 영혼이 상처 받을까 걱정된다. 그래, 적당히 ‘사과씨'라고 하자.

그래. 사과씨는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섬세한 사람이다. 어떻게 그와 안면을 트고, 친해질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나에겐 그처럼 섬세한 사람을 다룰 수 있는 센스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데 말이다. 어느 바에서 만났을까? 아니면 커피숍? 길에서? 생각나지 않는다.

섬세하다는 것도 하나의 재능이다. 무척이나 성가신. 한 달에 가상화폐로 몇 백 퍼센트 수익을 올리네, 삼성전자니 하는 주가가 어떻게 움직이네, 집값이 폭등하네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말 없는 통계는 누가 젊은이들이 몇 병의 술을 마셨고, 자살률이 높아졌으며, 태어나는 이보다 죽는 이 가 더 많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우리 같은 삭막한 사람들에게는 퍽 와닿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성가신 ‘섬세한'이라는 재능이, 사과씨를 줄곧 힘들게 했다는 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섬세함은 -그에겐 다소 미안하지만- 일종의 무능함과 같다고나 할까…… 공감이나 배려, 이면의 의미 같은 걸 전혀 개의치 않아야 비로소 현대 사회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연약한 영혼은, 나에게 실제로 번번이 힘들게 입사한 회사들 마다 채 두 달을 못 버티고 나왔다고 했다. 그에게 회사는 기계적이고, 삭막한 곳이었다. 그는 나에게 언젠가 그곳에 더 있었으면 언젠가 미쳐버렸으리라고 말했다.

(같은 논리로, 그는 비트코인이니 주식이니 하는 것도 하지 않았다. 뭔가 실질적인 의미가 없어 보인다나 뭐라나.)

따라서 사과씨가 이 사회의 빌어먹을 계층 피라미드의 꽤 아래쪽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 친구는 지나치게 낭만적이었다. 저번에는 길을 가다 노점 할머니가 파는 나물을 몽땅 사질 않나(그는 야채를 잘 먹지 않았다), 길고양이를 구조해 병원비로 수십만 원을 쓰고 날리질 않나(정작 자신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주제에). 저번에는 나에게 돈을 좀 빌리길래 뭐하나 했더니, 아내의 생일을 맞아 꽃을 산다 했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장미꽃을……

아! 사과씨의 와이프. 그를 이야기할 때, 그의 아내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그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그는 아내 이야기를 할 때 눈이 그 어느 때 보다 황홀함으로 반짝인다. 내가 하는 금융이나 부동산 이야기에는 죽은 동태 눈깔 같던 그 눈이 말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눈을 반짝일 때는, 수없이 들은 이야기이지만 나는 마치 처음 들은 것 같은 반응을 해줘야 한다. 그러면 그는 그의 암울한 20대 중반, 일을 구하기 시점을 아련한 눈빛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위에서도 서술했지만, 큰 회사는 사과씨에게 퍽 어울리지 않았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끝에 사과씨가 회사를 나왔을 때, 이 사회는 사과씨 같이 섬세하고 낭만적인 사람은 견디기 힘든 가난을 선물로 주었다. 이 선물 때문에 사과씨는 몇 차례 집을 옮겨야만 했다. 한 번씩 옮겨 다닐 때마다, 집의 크기는 절반으로 줄어갔다. 라면 냄비와 수저 세트 하나 빼고는 다른 집기들은 필요 없었다. 애초에 넣을 공간이 없었으니까. 에어컨은 수백 년은 된 골동품처럼 뽀얗게 먼지가 쌓여있었고, 한 여름에도 바닥은 항상 냉골이었다. 그 시절 사과씨는 그랬다.

이 무렵을 회상하면서 사과씨는 마치 ‘영혼이 데시케이터 안에서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SNS에 나오는 멋진 휴양지의 사람들과, TV에서는 맛집이 흥하네 망하네 평가를 하고 있고, 드라마에서는 몇 백억이나 되는 돈을 두고 사람들이 다투고 있있었으니까. 길거리의 사람들도 고민이라곤 없이 웃어제끼고,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다툼조차 사과씨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벌써 세 끼째 신라면을 먹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현실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 든 것이다.

돈에 영혼의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영혼에 총부리를 들이대기는 했다. 이 협박에 사과씨는 현실의 일을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 나이 먹도록 변변한 스펙 하나 쌓지 못한 사과씨를 받아줄 ‘괜찮은' 기업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조금씩 조금씩 타협해 간다면, 저기 멀리 원양 어선에서 고기를 잡는다는 선택지와 국내 최고 굴지의 대기업이라는 선택지 사이의 그 넓은 스펙트럼에서 뭔가를 찾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영혼을 깎아먹는 일이다. 적어도 낭만적인 사람들에겐 말이다.

그렇게 낭만이 현실과 타협하게 될 때 우리는 비현실적인 허무를 만나게 된다. 이 허무는 자신을 부정한다. 자신을 향한 부정은 영혼을 꼭 필요한 부분만 남긴 채 깎아낸다. 주위엔 온통 어둠뿐이라, 눈을 크게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이다. 그렇게 사과씨는 거의 굶어 죽기 직전에 – 요즘 사람들은 아사할 것 같다는 느낌을 알까? – 그 이상한 출판사의 대머리 사장과 가까스로 만나게 되었다.

대머리 사장의 그 작은 출판사가 잘못된 일을 하는 곳이라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출판사는 로맨틱하다.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책의 내음이 입구부터 뿜어져 나오고, 행간과 작은 디테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지적인 사람들, 저 멀리 윤전기가 돌아가며 내는 따뜻한 굉음들……

하지만 모든 출판사가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사과씨가 다니게 된 출판사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는 더럽고 하기 싫은 해야 하니까. 출판사에서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덜 로맨틱한 일, 그것은 바로 전단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종이 전단지라니 충분히 우스워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게 이 출판사의 대머리 사장이 재빠르게 캐치한 부분이었다. 가장 빠르게 버려지는 종이 매체를 생각해보자. 내가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우편함에 가득히 쑤셔 넣어져 있다. 아니면 지하철 출구 앞에서 잠깐 사람들 손에 들린 다음, 공중으로 흩뿌려진다. 청소부 외에는 아무도 주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전단지는 벽에 덕지덕지 붙어서 시각공해를 일으킨다. 그게 전단지다. 종이로 인쇄되는 스팸메일.

당장 이메일 함만 열어도 빼곡한 스팸메일 사이에서 짜증이 잔뜩 나 ‘금년도 인금 인상 결정 안’ 같은 중요한 메일도 같이 버려지는 실정이다. 그러니 손에 들리는 전단지는 더 할 것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종이를 버리는 이 행위에서 돈의 냄새를 맡은 이 대머리 아저씨는 가리지 않고 많은 전단지를 만들었다. 책 따위가 팔리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많이 순진한 종이들이 인쇄기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기에, 사장에게 필요한 건 ‘더할 나위 없이 순종적인, 궁지에 내몰려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아무 말 없이, 템플릿에 맞춰 전단지를 뚝딱뚝딱 만들기만 하면 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실력을 볼 필요가 있나. 애당초 뭐, 아무도 보지 않으니 어떻게 만들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싸게 후려치는 월급 역시 덤이다.

이 출판사 사장은 사과씨에게서 사회적 약자의 냄새를 맡았다. 그는 이런 쪽으론 기가 막히는 양반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사악한 계약이 사과씨에게 일방적으로 나빴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신라면이 신라면블랙으로 바뀌었다. 조금 더 욕심부리면 봉지 김치도 한 팩이나마 책상 위에 올릴 수 있었다. 그뿐만인가! 샤워할 때 짧게 온수를 쓸 수 있었고, 세일할 때 산 청하 한 병이나마-소주는 사과씨에게 너무 독했다 - 마실 수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이 젊은이의 목에 질긴 올가미를 두르고, 그 숨통을 잠깐 틔워주었다.

 

섬세한 영혼은 조금씩 먼지가 되어 흩어져갔다. 전단지를 만드는 일은 잔업도 없고, 업무 스트레스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젊은이를 위한 일을 결코 아니었다. 인생에 닳고 닳은 – 요컨대 대머리 사장같이 –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손으로 만든 피조물이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은 썩 유쾌하지 않다. 미래가 없는, 앞날이 캄캄한 일이란 건 누구나 안다. 사과씨 스스로가 더욱.

낭만적인 영혼이란 건 성가시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 특유의 섬세함 때문에 그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르다. 시대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리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만약 사과씨의 이야기를 듣는 당신이,

“어째서 더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거죠?”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리 섬세한 영혼이 아닌 것이다. 당신의 그 무감각한 영혼은 세상에 적응하고, 더 좋은 음식을 입에 넣으라고 당신의 몸에게 종용한다. 당신은 사과씨를 이해할 수 없다. 사과씨의 몸을 휘감고 있는 무력감을 당신은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낭만적인 영혼은 갑자기 이런 행동도 한다. 도통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 차곡차곡 적금을 들고, 좋은 직장을 위해 분투하고, 주가 차트를 들여다보고, 전셋값 폭등을 걱정하며 차근차근 돈을 모으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궁지에 몰린 쥐가 하는 것과 같은 마지막 발악, 최후의 외침이다. 자기 파괴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 누구도 사과씨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에게는 이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물론 그렇기에 이 대목이 사과씨의 이야기에서 사과씨가 가장 빨리 넘기고 싶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 말이다. 이 부분만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지, 매번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후벼 파기로 했다. 나는 무신경한 사람이었으니까. 사과씨는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J 씨(내 이름이다)는 그런 경험 한 적 없으신가요? 그러니까…… 폭식하는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전혀 도움이 안 될 걸 알면서도 폭식을 하면 좀 기분이 풀리잖아요?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뒷일 생각 안 하고 전 재산을 털어서 해외여행을 간다던지 하는 것 말이에요.”

물론 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지만,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갈 뿐이었다.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세상이 지치지도 않고 착실하게 사과씨의 영혼을 죽여나가고 있던 때, 여름휴가 – 놀랍게도 전단지 시장에도 비수기가 있다 -를 맞은 사과씨는 갑자기 한 생각에 사사로 잡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피파니'였다. 벼락이 때리는 것 같은 영감 말이다. 적절한 때, 적절한 사람에게 이런 영감이 오면 분명 세기에 남을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테지만, 이 경우에는 영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좀 더 나쁜 쪽으로 영 아니었다.

사과씨는 지금까지 모은 돈과, 앞으로 모을 돈 까지 박박 끌고 모아 한 번에 내 다 버리고자 했다. 그렇다. 사과씨는 술을 마시러 가자고, 평소라면 꿈도 못 꿀 정도로 비싼 술을 마시러 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홀린 듯 양복점에서 의뭉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고급 양복과 구두를 빌리고, 사과씨는 어느 호텔의 멋진 라운지 바에 갔다.

 

하지만 처음 입어보는 까끌까끌한 고급 양복은 답답하기만 했다. 구두는 어딘가 맞지 않는지 걷는 내내 발목 언저리가 까진 듯 아파왔다. 메뉴판은 또 어찌나 어려운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순간 사과씨는 자신이 쫓겨날 것 만 같았다…… 초라한 자신의 본모습을 들키면서 말이다.

“뭐 비렁뱅이 녀석이 이런 곳에 다 올 수 있담.”

하면서 90년대 티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문 밖으로 내동댕이 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누구도 사과씨에게 관심이 없었다. 바 너머의 바텐더는 별 감흥 없이 잔을 반짝반짝하게 닦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의 대화 상대와 이야기하던지,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메뉴판에 쓰인 소주 6병이나 하는 가격의 위스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위스키를 주문할 때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스키에 타는 목이 내뱉는 비명을 참고 견디자, 바는 조금씩 조금씩 돈 값이라도 하듯이 변해갔다. 사과씨는 그 알콜의 알딸딸함 속에서도 모든 기억하려고 애썼다. 손에 느껴지는 얇은 유리잔, 어두컴컴한 조명, 고급진 어두운 나무 테이블의 감촉, 테이블 너머 웃는 얼굴로 잔을 닦고 있는 바텐더들……

사과씨의 손에 들려 있는 이 한 잔이 소주 몇 병보다 비싼 처음 마셔보는 위스키라는 것과, 저 바텐더들의 월급이 사과씨의 배는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렌트해 입고 있는 이 고급 양복에 술이라도 한 방울 튀면 뒤처리가 아주 곤란해지란 것도 괜찮았다. 여기서, 사과씨는 전단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유하고, 한가로우며, 자신감 넘치는 남자였다.

모두 사과씨를 비난하지는 말자. 그가 이해가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충분히 섬세하지 못한 탓이다. 아니면 적당히 사회의 기형적인 구조를 탓하기나 하란 말이다. 우리는 그저 이 영혼을 순수하게 지켜볼 뿐이다. 곳 짓밟혀버리는 영혼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 섬세한 영혼을 말이다. 쉿 쉿, 이제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싸한 알콜냄새를 뿜어대며 찰랑거리는 위스키에서 눈을 때 고개를 들었을 때, 사과씨는 바 좌석 건너편에서 술을 마시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사과씨처럼 바에 혼자 온 듯, 다리가 기다란 칵테일 글래스에 담긴 투명한 술을 우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사과씨는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또 이야기를 끊어서 미안한데, 당신에게도 그때를 회상하는 사과씨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 눈이 반쯤 감겨서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과씨를 말이다. 나는 정확하게 지금 이 표정이 그때 그 바에서의 사과씨 표정과 일치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새삼 놀란다. 사람이 이렇게 감성적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말하는 도중에도 다시 사랑에 빠지고, 한 마리 새 처럼 깊은 밤을 날아서 그녀에게 날아갈 수 있는지.

사과씨는 대뜸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모르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수작을 거는 사과씨라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 사과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사과씨의 목을 태우고 있는 이 황금 및 액체가 사과씨의 용기를 돋구었다. 재물의 신이 사과씨의 어깨를 주무르며 힘을 보태주었다. 렌트한 반짝거리는 구두가 발걸음에 자신감을 얹어주었다. 비싼 양복은 비싼 값을 했다. 그는 침착하게 찰랑이는 잔을 들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녀는 사과씨를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차가운 들판 위에 부는 봄 내음 같은 웃음이었다. 곧장 얼마 남아있지 않던 사과씨 마음 안 모든 빗장이 철컥하고 풀렸다. 그 눈웃음에 옅게 풍겨오는 향수 냄새가 지금까지 맡았던 사과씨 기억속의 모든 냄새를 덮었다. 그녀가 웃자 세상 모든게 웃었다. 그녀가 말하자 세상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사과씨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세련된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어떤 그림쟁이가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사과씨의 눈에 가득차있는 사랑, 아니 그걸 넘어 거의 동경과 숭배에 가까운 이 감정을 어떻게든 그려내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것 만으로 세기에 남을 걸작이 되었을 테니까.

그녀가 입은 실크로 된 붉은 색 드레스는 허리를 우아하게 감아 내려왔다. 깊은 듯 깊지 않게 패인 앞섶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분명 누군가 이 완벽한 사람에게 바치기 위해 한땀 한땀 정성들여 만든게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윤기있게 찰랑거리는 긴 웨이브진 머리와 그 사이로 반짝이는 귀걸이는 어떤가! 귀걸이는 그녀의 귀에 걸려 있으니 저기 하늘의 가장 밝은 별 보다 더 반짝여 보였다. 얇고 긴 손가락 중간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 사과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약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이 그녀를 보았다면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햅번 대신 그녀를 출연시켰을 것같다고.

사과씨는 긴장하지 않기 위해서, 그 어느 회사 면접 때 보다 더 진땀 빼야했다. 임원 면접은 그것에 비하지 못하리라. 떨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긴장하지 않아야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별 볼일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했다. 그녀가 아주 우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사과씨의 직업을 물었을 때, 사과씨는 이렇게 말 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저는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어요.”

거짓말은 기름칠이라도 한 것 처럼 술술 나왔다. 잘나가는 회사의 포스터를 디자인 한다던가, 어떤 미술관의 광고 의뢰를 받는다느니, 여러가지 컨퍼런스를 간다느니, 어떤게 자신의 작품이라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평소의 사과씨라면 이 중에서 단 한개도 버벅이느라 제대로 말하지 못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만은, 그 바 안에서 만큼은 사과씨는 진짜로 그런 일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다행히 이 거짓말은 먹혀들었다. 으레 누구라면 갖고 있는 경계심을 풀고 그녀도 사과씨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사과씨에게 자신 역시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분야는 좀 다르다고 말했다. 그녀는 옷을 디자인 하는 사람이었고, 누구나 들으면 알 만한 유명한 디자이너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 옷 역시 자신이 디자인 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과씨는 생각했다.

‘맙소사,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잖아! 이렇게까지 완벽할 수 있다니!’

 그 뒤는 말할 것도 없다.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사소한 취향을 꾸며내느라 속이 덜컹한 적은 있었지만, 그녀가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최근에 방문한 이름모를 별 많은 호텔과, 호텔의 라운지 바를 논했다. 유명한 인사들과, 비싼 차들과, 해외의 휴양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주식을 이야기하면서 장난기 어린 한숨을 쉬었고, 집값을 이야기하며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면서도 진지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것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처럼.

그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었으니까. 사과씨는 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그 동안 사과씨를 눌러대고, 저기 계단 밑으로 굴려버리기만 하는 사회가 처음으로 우스워 보였다. 단지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바에 왔다는 것 만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멋지고, 완벽한 여자와 이야기 할 수 도 있다. 조금 있으면 추락한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와, 정말 이야기가 잘 통하네요.”

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사과씨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게 세상과이 이 불공정한 게임에서 쟁취한 사과씨의 최초의 승리였다. 그 순간, 날카로운 이빨의 거대한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쟁취하는, 옛날 동화속의 왕자가 되었다. 그녀의 그 한 마디로 말이다. 세상은 이제 하나의 시시한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세상은 그녀에 비하면 농담은 커녕 하나의 작은 문장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사과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 사과씨는 그 짧은 술자리가 마치 찰나의 순간 같았다고, 새의 깃털이 땅에 떨어지는 짧은 순간 같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칼에 영혼이 베이는, 영혼에 깊은 상처가 남는 짧은 순간이었다고 말이다. 사과씨는 그녀와 함께하는 눈부신 미래를 그렸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는 중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날 사과씨가 느낌 그 깊은 감정을 어느정도 나마 공감할 수 있다. 대머리 사장에게 양해를 잔뜩 구하고 양복을 반납하러 가기 위해 1시간 거리의 그 먼 길을 가는 그의 심정을 말이다.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모든 순간이 술 때문이었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혈중의 알콜 농도 따위는 아무 문제 되지 않는 순간이었으니까.

한 여름밤의 꿈은 깨졌다. 심지어 즐겁고, 행복했던 만큼 더 산산히 조각나는 것 같다. 이제 다시 윤전기가 곧 시체가 될 종이들을 뱉어내는 소리와, 죽음을 예감한 잉크들의 냄새를 맡으며 일터로, 출판사로 돌아가야 했다. 전단지를 만들어야 했다. 전단지 속의 오이가 사과씨를 조롱했다.

-      멍청이 같으니라고. 그런 델 가서 뭐 해야 했던거야? 뭐를 바란거야? 너가 얻은게 뭐가 있긴 있어?”

사과씨는 그렇게 전단지와 씨름했다. 어떤때는 전단지 속의 헐벗은 헬스트레이너가 사과씨에게 말을 걸었다.

-      어떻게 너 같은 사람을 좋아 할 수 있겠어? 완전 아무것도 없잖아!

사과씨는 계속해서 전단지를 만들었다. 대머리 사장의 감시 속에서, 사과씨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들면 만들수록, 바에서 만난 그녀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녀와 함께 이루었고, 이룰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들이 사과씨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모든 대화 한 마디 한 마디가 사과씨의 관절에 남아 타자를 더디게만 했다. 그래서 그때를 회상할 때면 잠시나마 전단지에 들어갈 내용을 입력하지 못했다. 점점 늦어지는 타자의 소리에서 사과씨의 상태를 예리하게 캐치해 낸 대머리 사장이 호통쳤다.

“사과씨! 언제 태양 마트 전단지 건 가져올거야! 앞으로 10분 안에 인쇄해야 한 단 말이야.”

사장의 말에 정신을 잠깐 차리고, 도대체 여기서도 잘릴 수 는 없다는 현실적인 내면의 조언에 따르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그 바에 가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작은 기적으로 그녀가 다시 그곳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사장은 도통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저 멍청한 녀석 – 사과씨, 미안합니다 -은 저기서 저렇게 멍때리고 있는거지?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냔 말이야. 오늘 나가야 할 전단지가 몇 부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에도, 사과씨는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다시 이어지는 로맨틱한 상상을 하다고, 다시금 사과씨의 기분을 다시 지각 너머 맨틀까지 끌고 가는 것은 이런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그건 거짓말이었다는 생각말이다. 그 바에서의 눈부신 모습과, 지금 작고 쪼들리고, 빛바랜 모니터 너머에 앉아, 누구도 보지 않을 전단지를 인쇄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말이다. 자신은 디자이너도 아니었고, 부동산은 커녕 내일 먹을 라면의 이름 조차 불명확하다고, 사과씨는 그녀에게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그러면 다시 사과씨의 그 좁은 사무실은 그때의 그 멋진 바로 다시 옮아가는 것이었다. 둘은 마지막까지 바에 남아있었고, 바텐더들은 초연한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누가 보더라도 금방이라도 바를 뛰쳐나가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에 막이 내리고 이제 끝날 시간이 온 것이다. 사과씨는 그 자리에 일어나서, 조금도 떨리지 않는 손으로 어마어마한 액수의 카드를 긁으면서, 바에서 나갈 때의 상황으로 회상을 옮아갔다.

그때의 그 상황이란! 사과씨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을 더더욱 반짝인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내가 고개를 숙여서 그의 눈빛을 피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둘은 바를 나와 길 거리를 조금 걸었다. 이태원 즈음일 것이었다. 도로에는 차가 한적하게 지나다니고, 언덕에서 내려오는 공기는 이상하게 맑았다. 달은 또 어치나 휘엉청하는지, 그녀의 얼굴에 비친 달빛 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둘이 이윽고 걷고 걷다 역에 닿았고, 이제 헤어질 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누가 주문이라도 한 것 처럼 둘 다 쭈볏쭈볏했다. 사과씨는 바로 지금이 그 기회를 잡을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꿈에도 그리던 완벽한 사람과, 이렇게 멋진 사람과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 말이다. 지금 이름을 묻고, 번호를 받아가고, 카톡을 이어가고, 전화를 하고…… 이런 행복한, 평범한 연인들의 이야기.

하지만 그 역 바로 앞에서, 사과씨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잡아먹혔다. 번호가 무엇이냐고, 다시 만날 수 있냐고 물어야 할 그 타이밍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다. 정확히는 이렇게 멋지고 완벽한 여자가 자신과 만나주지 않으리라는 상처입은 자신의 영혼이 사과씨의 입을 틀어막았다. 번호를 물어보는 사과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번호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저기, 우리 즐겁게 이야기 하느라 못 물어봤는데,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당혹감과 – 분명히 그런 것을 느꼈다고 사과씨가 말했다- 안도감, 의아함 같은 것이 한번에 섞어 사과씨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아까 본 그 환한 웃음으로, 사과씨를 한번에 사랑에 빠지게 한 그 매력적인 웃음으로 말했다.

“청하, 청하라고 해요. 그 마트에서 파는 술 이름 청하 말이에요.”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과씨가 물을 수 있었던 건 말이다. 그대로, 사과씨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려 그녀를 뒤로하고 역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그녀를 잡고 번호를 물어봐! 연락을 할 수단을 만들어 놓으라고! 라고 누군가 자꾸 말을 걸었지만 사과씨는 그러지 못했다. 12시가 지나 환상이 깨지고 있었으니가. 이제 요정의 마법은 오간데 없고, 마차는 호박으로, 드레스는 넝마로 변할 시간이었다. 낭만적인 현실에서 이제 비현실로 돌아올 차례였다.

 

그렇지만 사과씨는 영영 그 순간에서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았다. 일은 자꾸자꾸 늦어졌다. 사장의 호통은 한 동안 효과가 있는 것 같다가도 다시금 알지 못할 곳으로 사과씨를 보내버렸다. 그리고 운명은 얼마나 얄굳은 지, 힘겹게 전단지 작업을 하고 있는 사과씨를 이렇게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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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뜻하지 않게 청하란 이름을 보자마자 사과씨의 마음은 아득히 날아가버렸다. 아, 번호를 물어볼 걸 – 하는 후회 때문에, 그 단 한 문장 때문에 사과씨는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실제로 커서가 깜박깜박하며 청하라는 단어를 지날 때, 눈물은 또르륵 굴러 사과씨의 키보드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자신을 이 지독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든 자신의 그 낭만적이고 연약한 영혼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다시 한 번만 그녀를 볼 수 있으면! 사과씨는 말도 못하고 컨트롤 S를 누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사과씨의 늙고 지친 컴퓨터는 그 작은 파일의 저장도 힘겨워하여 오래도록 알림창을 띄워놨건만, 사과씨는 그게 마치 청하씨와 자신과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리 같아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이제 다시는 청하라는 이름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적인 느낌이 들었다. 사과씨가 건네주는 USB를 받으면서 사장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과씨가 퍽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 약 일주일이 넘는 시간동안, 난 그가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사람 특유의 슬픔에 푹 젖어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한다. 그는 비록 ‘그냥 있었다고’ 말하긴는 해도 말이다. 꼭 필요한 영혼의 한 부분 마저 깍여 나가서 넝마주이가 된 사과씨의 모습을 나는 그릴 수 있다. 아마 그에겐 몇 끼를 연속으로 라면을 먹거나, 수도가 끊겨서 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난방이 안되 추위에 떠는 것 보다 더한 고통인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대머리 사장은 출판사의 문을 똑똑 두드리고 온 한 사람을 맞았다. 또 전단지를 의뢰하는 어리숙한 자영업자를 예상했던 사장의 경쾌한 발걸음은, 이내 신분을 묻는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변했다. 자영업자라기에는 좀 후줄근하고, 좀 어린 것 같은 어떤 한 여자가 출판사의 문간에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필시 자신의 출판소에서 인쇄했을 전단지가 들려있었다.

그녀가 별 소리를 하기 전에 벌써 이게 전단지에 대한 컴플레인이라고 생각한 사장은 곧장 사무실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사과씨를 불렀다.

“사과씨! 이리로 와봐.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지만 사장은 일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대번에, 사과씨와 그 묘령의 여인이반쯤은 놀람으로, 반쯤은 기쁨으로 가득 차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는 이런 쪽으로는 기가 막힌 사람이었다). 사장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사과씨는 그 문간에 서 있는 사람을 곧장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는 청하였다. 다시는 만날 길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사과씨는 곧장 그녀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청하가 말했다.

“하…… 어쩐지 쌔 했지.”

그러면서 청하가 배시시 웃는 것이었다. 사과씨가 반했던 그 웃음이었다.

“디자이너라더니,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던 거였어요?”

하지만 그 물음에는 조금의 원망이나 질책도 담겨있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다고나 할까. 사과씨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좀 안심이되요. 저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이거든요. 저, 여기 출판소 앞 세탁소에서 일해요. 그 저번에 입었던 옷은 어떤 한 손님 거였거든요. 본의 아니게 속였다면 미안해요.”

그녀의 사과를 듣고자 한 것이 아니었기에, 사과씨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치 고전 소설의 한 장면에서 나오는 것 처럼,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도, 그것을 굳이 뿌리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녀가 말했다.

“참, 별일이라니까.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게 됬을까?”

 

자, 이렇게 사과씨는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사람 중 하나다. 집 값이 한 달에 몇 퍼센트씩 오르고, 금리 인상이네 암호화폐네 하는 세상에서 근심과 걱정, 증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말이다. 섬세하고 낭만적인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딱 하나, 딱 한 명만 있으면 세상은 그 자체로 선물이 되는 것이다. 여전히 그는 세상 살이가 팍팍하다고는 말하지만 말이다.

여담이지만, 그의 결혼식에 왔을 때의 사장 표정이 볼만 했다고 한다. 사장은 얼이 빠져있었다는 데, 추후에 물어보니 사과씨 같은 사람이 결혼할 수 있을지 몰랐더랬다.

“아니, 이렇게 맹한 놈도 결혼을 할 수 있다고?”

뭐, 그래도 축의금은 넉넉하게 챙겨줬다니까 제 삼자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으리라.

여기까지 하면 사과씨의 이야기가 다 끝난것 같지만…… 사과씨는 청자인 나를 빤히 바라본다. 무언가 더 엄청난게 남아있다는 것 처럼 말이다. 벌써 몇 번 들은 이야기라 나는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알지만, 모른척 한다. 그러면 그는 살짝 애닳은 상태로 말한다.

“J씨, 그런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그녀가 저를 찾아왔는지요. 그때, 그 바에서는 분명히 아무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나 전화번호 같은걸 남겨놓지 않았거든요. 진짜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까지 말하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한다. 물론 꽤 기분 좋은 이야기라 고통스럽지는 않다. 솔직히 말하면,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기는 하다. 그건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였으니까.

 

그녀와 재회 한 후에, 하늘에 떠 있던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 한쪽에 벙쪄있는 대머리 사장을 그대로 두고, 사과씨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다시 보게 되서 정말 좋은데, 어떻게 나를 찾은 거에요?”

사과씨의 물음에 청하가 대답했다.

“온 동내에 내가 좋다고 흩뿌려 놓은 주제에 뭐라고요?”

사과씨는 어안이 벙벙하여 청하가 들이미는 전단지의 한쪽 구석, 작게 쓰여 있는 카피프레이즈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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