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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라 Mar 23. 2017

반디와의 10년

4. 여름휴가


4. 여름휴가 (7)


  오늘 우리 휴가의 마지막 일정은 사북을 잠시 들렀다가 함백산을 가는 것이었다. 함백산은 차로 정상까지 갈 수 있는 산이다.

함백산을 가고 싶어 한 것은 피터였다. 피터는 산을 좋아했다. 대학시절 산악부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전문적인 등산의 이론을 배우고 국내산에서의 실전을 경험했지만 더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피터는 히말라야 14좌 등반에 대한 기사를 꼼꼼히 스크랩하는 습관이 있다. 원정대 속에는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 가끔 끼어 있었다. 피터의 컴퓨터 바탕화면은 항상 히말라야 사진이다. 그러나 피터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미련이라고 보기엔 뭔가 부족함이 있다. 피터에게 졸업 후 등산을 그만두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모는 난 등산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어 라고 항상 부연 설명을 한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K2가 나를 부른다거나 안나푸르나의 설경이 미치게 아름답다는 식의 유혹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젊은 날 잠시 스치고 지나간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아픈 사랑으로 기억하고 싶어 하는 일종의 감정적 사치 아닌가 싶다. 

이모는 피터의 사치를 존중해주었다. 감정적 사치는 사람들의 삶을 무척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에 충분히 부리는 것이 좋다고 했다. 

  정상을 조금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한여름인데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하고 심하게 바람이 불었다.

사방이 산이다. 겹겹의 패스추리처럼 산, 산, 또 산. 그 웅장한 산들의 가장 가운데 위에 우리만이 서있다. 산과 산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 마을이 있고 몇 개의 산을 넘어 또 마을이 보인다. 저기는 사북, 저기는 고한, 저기는 태백. 

너무 산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피터가 목이 메인 소리로 말했다. 

피터는 흥분을 감추거나 가라앉히질 못했다. 우리도 피터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요즘 일이 부진했던 피터에게 이런 시간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가슴의 돌 들 중 한 개가 녹아 없어진 듯했다. 우리의 이번 휴가는 성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섭과 마리는 연방 환호성을 질렀지만 내가 보기에도 피터의 벅찬 감정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이모는 바람이 너무 세서 반디를 내려놓지 못했다. 반디의 털은 함백산을 훑어가는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조금 더 가면 정상이라는 표지가 있었지만 그만 내려가기로 했다. 정상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에 우리는 마음이 맞았다. 이미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경치를 이미 보았으며 올라오는 길이 점점 가파르고 높아지는 것에 두려움이 조금 있었던 터라 내려가기로 했다. 

반디는 차를 타기 전 한쪽 다리를 들고 쉬를 했다. 요섭은 반디에게 영역표시 확실히 했으니 이 산의 일부는 반디 너의 것이라고 엄숙하게 말했다.

산을 다 내려와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빼 마시면서 피터는 비장하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제 다시 용기를 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럴때의 피터는 나보다도 순수한 어린이처럼 보인다. 

  우리의 휴가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오는 길에 들른 향토식당에서 곤드레 밥을 먹었다. 여기까지 와서 곤드레밥을 안 먹으면 도리가 아니라는 피터의 주장이었지만 요섭은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을 보더니 인상을 쓰고 메뉴판에 있는 음식 중 삼계탕을 먹겠다고 했다. 마리는 말하지 않았는데도 요섭의 그릇에서 가슴살을 떼어내잘게 찢어 반디 앞에 놓았다. 마리는 하루가 다르게 다정한 소녀가 되어간다.

  예민한 반디는 평소보다 잠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와 전화기받침대 사이의 구석에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반디를 안아서 침대에 눕히는데 잠시 눈을 떴을 뿐 곧 다시 잠이 들었다. 이렇게 곤하게 자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자면서 몇 번 부르르 떨고 약하게 소리를 내곤 했다. 아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디 동굴 속에서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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