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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라 Dec 26. 2019

        반디와의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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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고교생 요섭 (3)


6. 고교생 요섭 (3)


  요섭이 전국 고등학생 스피치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주제로 글짓기를 썼는데 그게 뽑혀서 대회참가 자격이 주어졌다. 이모는 요섭이 글짓기를 잘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믿을 수 없어서 여러 번 확인했다. 나중에 들으니 문장력이 뛰어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 확실한 주장을 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이 눈길을 끌었던 듯하다. 사랑은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논리가 넓은 의미로 먹혀들었다고나 할까. 

  요섭은 길길이 날뛰었다. 계집애들이나 나가는 대회 따위에 절대 안 나가겠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거부했다. 이모는 그 대회가 계집애들이나 나가는 것인가를 알아보겠다고 하자 계집애들이 안 나와도 안 나가겠다고했다. 본인이 안 나가겠다니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앞뒤 안 맞는 소리 하는거 보면 나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요섭은 예상대로 결국 대회에 나갔다. 연습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원고를 잘 외웠고 연습도 담당 선생님의 지도하에 그런대로 수월하게 마쳤다. 이왕이면 1등을 해서 대학 입시 때 경력사항으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이모는 우리에게만 말했고 요섭에게는 부담될까봐 말하지 않았다. 

  참가 학생 20명중 요섭의 순서는 12번째였다. 여학생이 17명이고 남학생이 3명이었으니 계집애들이나 나가는 대회임이 전혀 틀리진 않았다. 남학생들이 이리도 이런 분야에 무심하다니. 허지만 잠시 후 대회가 시작되면서 왜 남자애들이 안 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스피치컨테스트가 아니었다. 각종 퍼포먼스까지 합해져서 종합예술의 한 장르라고 과언이 아니었다.     

  1번으로 나온 애는 나와서 인사를 하더니 갑자기 노래를 불렀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제식 훈련이라도 하듯이 제자기 걷기를 하면서 온 세상 어린이가 다 만나서 함께 웃다가 그 소리가 달나라까지 간다고 노래했다. 노래가 끝난 후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멘트까지 상냥하게 날리면서 화려하게 자기 순서를 마쳤다. 

  두 번째 나온 애는 지구본을 들고 나와서 이 큰 지구에 우리나라가 얼마나 작은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세 번째는 마임을 넣었고 장애인도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뜻으로 수화를 첨가한 애도 있었다. 그저 소박하게 단지 스피치만 한 애는 12번째 출연자인 요섭이 처음이었다. 

  다른 애들 하는 것을 봐서 미리 기가 죽었는지 아니면 전의를 상실 했는지 요섭은 인사를 끝내기가 무섭게 빠른 속도로 내리 읊었다. 원고가 길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말했어도 제한 시간에 부족하진 않았으니 그 점은 참으로 다행이다. 

우리는 요섭이 발표하는 내내 손바닥에 지끈 지끈 땀이 났다. 잘하고 뭐고 그저 틀리지 않고 마칠 수 있기를 소망했다. 틀리지만 않고 마칠 수 있어도 다른 애들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기는 죽을지언정 못했다는 자책정도는 안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지만 신선한 면은 있었다. 첫 남학생이었다는 것과 장식없는 발표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피터는 요섭이 끝나자 손바닥이 부서지게 박수를 치며 토씨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다음부터 끝까지 두세 명을 빼고는 다 약간의 퍼포먼스를 곁들였고 코믹한 행동을 하는 애들은 객석에 웃음을 터지게 했으며 더러 중간 박수까지 받는 애도 있었다.

  요섭은 동상을 받았다. 본상인 금은동 외에 장려상을 비롯해 배려가 넘치게도 스마일상, 협동상, 친절상등의 명칭으로 참가자 반 정도에게 무슨 상이든 주어졌다. 

요섭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저녁에 탕수육과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요섭은 계집애들은 유치하다는 소리를 10번도 넘게 했다. 요섭도 동상 수상이 기쁘긴 한가보다. 우리는 요섭의 기쁨을 오래 축하해주고 싶어서 요섭의 허풍을 즐겁게 들어주었다. 그러나 요섭에게도 긴장되고 힘든 하루였던지 식사 후 반디를 데리고 오래 놀았다. 그건 요섭이 힘든 일을 치룬 후에 하는 행동 중의 하나다. 

  컨테스트 참가가 요섭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두 가지 중의 하나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절대 그런 대회에 참가를 안 한다거나 자신감을 얻어 또 나가는 것.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해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꽤 실질적인 소득이다. 

요섭에겐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시간적, 정신적으로 다른 것을 할 여유가 없어졌으므로 이번 대회 참가가 약간의 일탈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마리는 요섭의 수상을 꽤 부러워했다. 오빠는 좋겠다. 오빠는 놀아도 잘해. 

마리는 성장할수록 섬세해져서 안 해도 되는 것 까지 걱정을 했다. 

친구들이 싸워도 걱정을 했고, 화해시켜 줘야 하는 책임감을 짊어지려 했고, 화해시키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걱정이 오래갔다. 치우지 못하고 두고 온 쓰레기, 정리 못한 사물함도 다 마리의 걱정 속에 들어가 있었으며 용기 내서 했던 거절이나 곤란한 이야기들은 밤 새 마리를 괴롭혔다.

한번은 체육시간에 100미터 기록이 좋아 체육 선생님이 육상부에 들것을 권했는데 그걸 거절하고 나서 내내 불편해했다. 학교에서 선생님과 마주치는 것도 어려웠으니 체육 시간엔 어떠했을지 안 봐도 알 수 있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줘도 선생님이 섭섭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요섭은 세상을 그리 복잡하게 살 거 없다고 충고했지만 마리는 세상이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세상이 어째서 그런 판이한 양상으로 비추어질까 싶지만 생각하면 둘 다 정답일 것이다. 삶의 다양함을 받아들여 살 수 있다니, 난 요섭과 마리가 부럽다. 아직도 내 감정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솔직하지 못한 나는 제자리만을 돌고 있는데 말이다. 

이모는 나를 가끔 보고 있다. 이모는 내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보고 있는 이모의 눈 속엔 슬픔과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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