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미잘 May 01. 2024

더 나은 나는 무엇으로 만들까?

불안정한 스파게티 탑을 부수고

학교에서 4월은 과학의 달이다. 학교마다 과학 행사를 계획하여 진행한다. 우리 학년이 선택한 과학의 날 행사 활동은 스파게티 탑 쌓기였다. 스파게티 탑 쌓기는 스파게티면과 마시멜로를 이용하여 탑을 쌓는 활동이다. 스파게티가 뼈대, 마시멜로가 접합부가 되어준다.


스파게티 탑 쌓기 활동을 하기 전 '트러스'구조에 대해서 설명했다. 트러스 구조는 삼각형으로 된 뼈대 구조를 말한다. 트러스 구조로 쌓아야 탑이 튼튼하게 올라간다. 본격적으로 탑을 쌓기 전 설계도를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 설계도. 내가 설계도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말을 밉게 하는 학생이 있어서 다른 학생들이 설계도를 그리는 동안 잠깐 대화를 했다. 학생에게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 시간을 확인했다. 계획했던 시간보다 늦어져 있었다. 서둘러 탑 쌓기 활동을 시작시켰다. 전체적으로 모든 학생들이 제대로 참여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모둠별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 바퀴 휘 둘러보니 탑들이 엉망이었다.

"그건 뭐니?"

"탑이요."

분명 트러스 구조를 이용하며 탑을 만들라고 했는데 이건 구석기시대 움막과 더 비슷해 보였다.

"트러스 구조가 되도록 뼈대를 짜서 탑을 올려야지."

"우리도 삼각형 모양이에요."

"그렇게 해서는 더 이상 탑이 올라가지 않아."

"아니에요. 더 쌓을 수 있어요."

학생은 움막의 꼭대기에 마시멜로를 하나 올리고 그 위로 스파게티 몇 가닥을 꽃았다. 지탱해 주는 기둥이 없으니 스파게티는 옆으로 속절없이 기울었다.

"거 봐."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다른 모둠도 상황은 비슷했다. 불안정해 보이는 탑들을 보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지만 모두 들어먹질 않는다. 마치 서로 짠 것처럼 "할 수 있어요."


15분 후에 결과물을 확인했다. 중간에 내 조언대로 기둥을 추가했던 모둠만 탑 비슷한 무언가가 되었다. 나머지 모둠의 작품들은 뭔가 구조물을 만들었다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수업을 그렇게 처참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학생들에게는 내가 느끼는 실망감과 아쉬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다음 시간에 이어서 스파게티 탑 쌓기 활동을 하기로 했다. 두 번째 시간에 학생들은 왜 탑들이 무너졌는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나는 트러스 구조에 대해서 다시 가르치고 튼튼한 탑을 쌓기 위한 팁들을 안내했다. 다행히도 다시 쌓은 탑들은 견고하고 예뻤다. 학생들은 뿌듯해하며 사진도 찍어갔다.


나는 학생들이 다 가고 남은 빈 교실에 앉아 생각했다. 학생들은 왜 첫 시간에 내 조언대로 탑 쌓기를 거부했을까? 왜 무너지는 탑을 앞에 두고도 새로운 탑을 세우지 않았을까?

별로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다. 나도 익히 잘 아는 감정 때문이다. 기껏 만들어둔 탑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테다. 내 시간과 노력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 미련, 욕심, 아무튼 그런 끈적함.


오래된 쌀에는 바구미가 생긴다. 쌀통에 허연 가루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곤충의 실뭉치 같은 것이 섞여 있다면 바구미가 생겼다는 신호다. 우리 집에서는 바구미가 생기면 커다란 대야에 쌀을 모두 붓고 바구미를 골랐다. 수북이 쌓인 쌀을 손으로 쓸다가 까만 벌레가 보이면 집어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쉽게 보이던 것들이 점차 여러 번 쓸어내야 하나씩 보였다. 쌀 안에 숨어있는 애벌레며, 작은 크기의 바구미들이 손에 잡혀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이제 여러 번 쌀을 쓸어도 벌레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구미는 아직 쌀 무더기 속에 남아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시를 쓰는 건 꼭 바구미를 골라내는 일 같았다. 뭔가 영감이 떠올라도 곧바로 시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 처음 나온 문장들은 거칠고 단순하다. 그럼 쌀을 쓸고 벌레를 골라내듯이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골라내어 적었다. 더 적합한 단어가 없을까. 몇 번씩 머리 곳간을 뒤지다가 단어 하나 둘 씩 바꾸어 넣는다. 항상 고칠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시든 쏙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항상 소중했다. 누군가에게 시를 보여줬다가 비판을 들으면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쓰렸다. 어떤 비판은 한 연 전체를 바꾸거나 시의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도록 했다. 


그럴 때조차도 기껏 떠올린 단어와 문장들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단어, 어떤 문장들은 며칠을 걸려 생각해낸 것이기도 했다. 고쳐야 한다는 마음과 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보려 단어에 다른 단어를 덧붙여보거나, 새로운 문장들을 좀 추가하고 빼보고, 꼭 고쳐야 하겠는지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한다. 써둔 게 너무 아까워서 안 되는 줄 알면서 질질 끌고 간다. 그런 노력들이 더 좋은 시를 만들어내지만 결국 버려져야 할 것들은 버려졌다.

 

견고한 탑을 쌓아본 학생들은 다시 불안정한 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며칠을 걸려 써낸 문장들을 버리고 새로 고친 시들이 항상 더 마음에 들었다. 과거의 나를 버리는 일은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로 인한 변화는 불가역적이다.


빨리 포기했든, 오래 고민했든, 결국 새로운 탑을 세워냈는가?

교실에 남겨진 견고하고 튼튼한 스파게티 탑들 앞에서 뿌듯했다.

작가의 이전글 잘하고 못하고에 집중하지 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