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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갑낫을 Mar 18. 2022

계획은 사치 (2)

인생 2막 준비위원회

우리에겐 운명 같았던 그 땅이 숙소 사업을 하기에 부적합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대한민국의 논밭이 사시사철, 365일 우붓처럼 푸르른 게 아니었다.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여름 한 3개월 정도만 푸르르고 나머지는 을씨년스럽거나 수확이 끝난 형태일 거라고 하셨다. 우리는 왜 이걸 생각 못한 걸까?


여기서부터 약간 오랜만에 좌절이라는 놈의 맛을 보게 되었는데, 바로 앞쪽에 계단식으로 펼쳐진 논밭도 그저 뷰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논밭을 경작하기 위해서 농약을 살포하게 되는데, 이때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숙소에 쉬러 온 손님들이 농약 샤워를 하게 될 확률도 무시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선생님이 주시는 고견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나름 깊은 고민과 공부를 했고, 현장 답사도 거의 100군데 이상을 돌아다니다가 만난 땅이었는데... 선생님은 땅이란 것은 인터넷 쇼핑하듯 너무 조급하게 결정할 문제가 절대 아니라고, 더 길게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좌절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계획했던 대로 숙소를 오픈하려면 토지매매는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숙소 사업에 적합한 토지 매매 조건을 정리하여 체크리스트를 만들었고, 또다시 평일은 네이버 부동산에서, 주말은 현장답사를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주말에는 소형 주택 모델을 직접 보려고 경북 영천까지 가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집 짓는 학교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강생들이 꽤 많았다. 요즘은 그냥 농막이 아니라 6평, 8평대의 이동식 주택, 소형 주택이 정말 감각적으로 잘 나온다. 풍경 좋은 땅만 있다면 가져다 놓고 살아도 될 정도다.


그 외에도 숙소 사업을 준비하려면 알아야 할게 많았다. 실제 사장님들이 청소, 방역, 침구 관리부터 손님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고 시스템을 만드는 것. 더불어 요즘 감성숙소들은 건축단계부터 숙소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팬덤을 형성하기 때문에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원하는 토지 매물이 없는 날에는 위와 같은 숙소 운영 전반에 대한 부분들을 고민하고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포천에 기가 막힌 땅을 찾는다면, 포천 이동막걸리를, 여주에서 찾는다면 여주쌀로 만든 전통주 백년향을 웰컴 드링크로 제공할 참이었다. 그렇게 지역 특산물까지 고려해가며 열을 올렸는데..


00시 000지구 00000 3차
000동 0000호에 당첨되셨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이런 식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정우성의 얼굴만큼이나 늘 새롭고 짜릿한 건 왜일까. 우리는 계획했던 모든 것이 사치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업자금이었던 돈을 내집마련 계약금으로 쓰게 생겼고, 인생 2막은 민박집주인으로 살아보려 했는데 회사를 다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겨버린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청약 당첨은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주일마다 감사헌금을 내고, 조상님 묘에 찾아가 술 한잔씩 올려야 할 만큼 감사한 일이란 걸 안다. 그렇지만 내집마련만큼이나 조직 탈출도, 인생 2막 준비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대출과 이 과업이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다시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획은 사치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또 슬그머니 이런저런 계획을 적어본다. 돈 안 드는 사치는 얼마든지 부려도 괜찮다고 서로를 다독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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