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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행자들을 위한 도시

by 비갑낫을


얼마 전 토요일 잘란알로 아이리쉬 펍에서 한잔 하고, 푸드 트럭에서 스팀보트를 사서 그랩을 잡았다. 라마단기간이라 저녁 11시가 넘어도 교통 체증이 장난이 아니다. 20분이면 될 거리가 꽉 막혀 1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랩 기사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60대 인도 아저씨였는데, 목적지인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리쿼샵을 하는 친구에게 미리 구매해 둔 술을 한 병 픽업해도 되겠냐고 하셨고, 우리는 흔쾌히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무슬림의 나라는 돼지고기 말고도 술에도 엄격하기 때문에 술값이 매우 비싸다. 뜨끈한 완탕면 하나가 8링깃인데 맥주 한 병은 22링깃이다. 술값이 밥값의 두 배인 셈이다.


그래서 아저씨는 친한 친구에게 도수가 높은 술을 한 병 씩 사서 마신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 한 잔 하고 꿀잠에 드는 게 행복이라고 하셨고, 우리는 격하게 공감해 드렸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한 잔 하고 꿀잠에 드는 건 국적 불문 모든 술꾼들에게 국룰 같은 거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비싼 술값에 대해 푸념을 하다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쿠알라룸푸르 공항은 다양한 항공편이 거쳐가는 경유지이자 동남아시아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국제 허브 공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에어아시아로 나이로비도 갈 수 있으니 말 다했지 뭐.


얼마 전 실제로 찾아보니 몰디브 직항이 왕복 30만 원대, 퍼스는 25만 원 대면 갈 수 있고, 호치민이나 발리는 15만 원대, 끄라비는 8만 원이면 가더라. 여행을 안 가고 배길 수가 없는 가격이었다.


어쩌면 쿠알라룸푸르는 진정, 여행자들을 위한 도시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기가 막히게 잘도 찾아왔구나 생각하며 머무는 동안 가능한 여기저기 다녀봐야지,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아저씨는 작년에 다녀온 나트랑, 다낭, 방콕 등등 쿠알라룸푸르 주변 여행지들을 이야기하며 올해는 가성비가 가장 좋았고 맥주도 실컷 마실 수 있는 베트남을 다시 가볼까 한다고 하셨다.


아저씨에게 해외여행은 큰 마음먹고 일 년에 한 번 가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처럼 느껴졌다. 말레이시아 사람들 대부분이 여유롭게 즐기면서 살고 여행도 자주 간다던데, 진짜였다.


확실한 건 그날 만난 그랩 기사님이 우리네 부모님 세대보다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있다는 거다. 근데 또 생각해 보면 KTX 타고 부산 가는 비용으로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거니까 당연한 일이지 싶기도 하다.





파울로 코엘료는 여행은 언제나 돈이 아니라 용기가 문제라고 했지만 어디에 사느냐 즉, 지리적 특성을 잘만 이용해서 살면 여행을 가는데 용기까지 낼 필요도 없고, 돈도 문제가 되지 않는구나 싶었다.


누군가 어떤 삶을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나는 자주 여행 다니는 그랩 기사의 삶을 택할 것이다. 우주 에너지가 왜 나를 이 도시로 이끌었는지 알 것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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