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못하면 나중에 저 언니처럼 된다.”
(같이 알바하는 친구에게) 지긋지긋한 클리셰. 나 오늘 이 장면에 나오는 저 언니 역할했잖아. 자꾸 엘리베이터걸 왜 하라는 거야 진짜? 너무 웃겨서 웃음도 안 나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느 토요일의 일이다. 당시 내 친구가 예식장 주말 알바로 현금을 쓸어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갔는데
이렇다 할 경험이 없었던지라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장난감 병정 같은 유니폼을 입고 병정 모자도 쓰고 손님들을 안내하는 거였다. 문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안녕하세요. 웨딩홀은 6층입니다. 문 닫겠습니다. 올라갑니다. (땡큐)”
근데 더 문제는 난 또 이게 재밌다는 거였다. 나도 모르게 이입해서 내가 모시는 공주님 결혼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솔톤으로 임했다.
나는 그렇게 눈물 나는 단기 알바를 거쳐 주말 알바의 꽃이라는 웨딩홀 예도팀에 들어가게 됐고, 주말 오전 서울 전역의 결혼식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무튼 예도는 본래 학군단의 퍼포먼스다. 근데 이걸 또 자본주의 괴물이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더라.
예도 팀원은 웨딩홀 입장 안내부터 화촉점화 도우미, 신부가 버진로드를 걸어갈 때에 모형 칼을 들고 퍼포먼스 하기, 웨딩 끝나고 폭죽 치우기까지 담당한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게 예도 팀장의 영업력에 따라 그날의 예도팀의 페이가 달라진다는 거다. 추가 옵션을 계약하도록 유도하는 게 관건이다.
그러니까 기본 제공 내역은 입장 안내, 식이 끝나고 버진로드 정리까지만 포함되고 추가 옵션은 양가 어머님 화촉점화와 신부 입장, 신랑 신부 행진 퍼포먼스까지 추가로 결제를 해야만 서비스가 진행된다.
하여, 예도 팀장은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이 내용을 신랑님께 설명하고 가능한 모든 추가 옵션을 포함해 식이 진행되도록 하는 역할을 맡는다.
“신랑님, 결혼 너무 축하드려요! 오늘 예식 순서 한번 소개드릴게요.”라고 하면서 결혼식이 처음이기 때문에 화촉점화부터 예식 전반에 걸쳐 끝날 때까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어필하고
신부가 버진로드를 걸어오는 건 평생 단 한번뿐인 순간이니 저희가 제공해 드리는 입장(칼로 하는 퍼포먼스), 행진(폭죽) 퍼포먼스를 통해 조금 더 극적인 감동을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해서 계약을 따내야 한다.
이건 웨딩홀에서 결제하는 게 아니라 별도의 현금결제이기 때문에 상냥하게 설명드리면 대부분의 신랑님들은 바로 본인의 축의금 데스크로 달려가서 현금을 주신다.
“좋은 날”, “평생 한번뿐인 날” 너무 설레고 들떠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 이 흥미로운 사업 시스템은 예도 팀원으로 시작한 나를 기어코 예도 팀장까지 달게 만들었다.
때때로 신부 쪽 가족은 단 한 명도 참석을 못한 국제결혼 예도를 진행하는 날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진짜 눈물을 꾹 참고 진심으로 잘 사세요. 기도하면서 일했고
10분 간격으로 진행되는 공장식 결혼식에 너무 많이 노출되다 보니 내 결혼식은 발리 바닷가에 출장 뷔페 불러서 할 거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입에 달고 살게 했던 주말 알바의 기억.
내가 계약을 잘 따면 우리 팀원들이 벌어갈 수 있는 돈이 달라진다는 게 막연한 책임감을 주면서도 재밌었고,
누군가에게 평생 한 번뿐인 결혼식 진행에 꼭 도움이 되어 드리겠다는 진심이 온전히 전달되어야만 계약이 성사된다는 아주 기본적인 진리도 몸소 깨달을 수 있었던 소중한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