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영수 중에 언어 영역을 특히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고전문학을 모조리 외워버리는 걸 즐겼다. 한때는정철의 관동별곡 전문과 현대어 풀이를 그냥 외워서 시험을 보기도 했다.
직유, 은유, 대유 등 비유의 종류를 헷갈리는 것보다 완벽하게 외워서 시험을 보는 편이 내게는 더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수많은 글들을 어떻게 현대어 풀이까지 외웠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랬다. 사람이 진짜 못하는 건 없구나 안 하는 거다, 라는걸 그때 깨달았다.
고전시가는 보통 수험생들을 좌절하게 한다는데 나는 그냥 외우면 되니까 편했고, 그걸 계기로 대학생이 되자마자 언어 영역 전문 과외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이때 또 하나 깨달은 바는 뭐든 악착같이 해두면 언젠가는 쓰임이 다 생긴다는 것이다.
당시 목동부터 대치동까지 과외 업계를 주름잡던 사촌 언니의 소개로 여의도와 대치동을 오가며 고전문학 전문 과외를 뛰기 시작했다.
고전 문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고액을 받으며 과외를 할 수 있었고, 이건 또 대입 자소서 컨설팅으로 이어져 꽤나 쏠쏠한 벌이가 되어주었다.
고전문학에 특화된 과외 선생님. 남들이 별로 하기 싫어하는 메뉴를 잘하니까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경영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었지만 사실 학교밖에서 경제 논리를 뼈저리게 체득하는 와중이었다.
당시 여의도에 사는 친구의 과외를 꽤 오래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님이 다음 주부터 평일에는 개포동으로 와주실 수 있냐고 하셨다.
평일 하루는 개포동, 주말 하루는 여의도. 왜인고 하니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개포동에 아파트 월세를 얻어 두집 살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었다.
평일에 방문한 개포동 집은 너무 충격적이라 기억이 또렷한데, 진짜 학교와 학원 사이에 과외만 잠깐 하는 그런 집이었다. 살림살이도 없고 아이의 학업만을 위해 잠시 빌린 집.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한국의 입시 문화를 극혐 하면서 나는 그 삶을 졸업했다고, 그걸 이용해서 또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런 나 자신이 그리 마땅치는 못했지만 내가 원하는 어학연수와 여행을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과외를 1년 조금 넘게 했나? 영국 브라이튼 한 달 연수와 두 달간의 유럽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었다.
오늘 조조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와서일까. 유만수만큼의 절박함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의 고전문학 과외 알바 역시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