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을 하고 온 뒤로도 학교 생활은 여전했다. 물론 조금은 익숙해져서 친구들과도 좋았고 일부 선배들과도 나쁘지 않았지만 학교 분위기가 왜 이리 어두웠는지 늘 답답했다.
기억에 남는 두 수업이 있다. 첫 번째 수업, 디자인과라 수업 중에 석고 댓생 실습이 이었었는데 수업 시작 후 담당 선생님이 안 오신다. 그러다 늦게 나타나서 이래저래 하라고 대충 설명하고 가신다. 얼마나 황당하던지. 그나마 내가 입시 준비하면서 배운 게 있다고 아이들 그림을 봐주고 가르쳐주었다. 나도 더 배워야 하는데 내가 뭐 하고 있나 싶었다.
그러다 수채화 수업이 있는 날 운동장에서 풍경을 그리고 채색을 했는데 수채화 기법으로 하고 싶지 않아 물 농도를 적게 해서 유화 같은 느낌으로 그려봤다. 나름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보시더니 넌 수채화를 하라고 했더니 유화를 그렸냐며 핀잔을 줬다. 그때 선생님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칭찬해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두 번째 수업, 스케치북에 선, 면 등을 활용해 자유롭게 드로잉 하고 채색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런 수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정말 몰두해서 그렸다. 잘 그리겠다는 마음보다는 그리고 싶은 걸 그리자는 마음이었다. 선생님이(댓생 선생님과 다름) 교실을 한 바퀴 돌며 그림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 정말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이 조용한 가운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원석이 그림 너무 잘 그렸다. 꼭 대학에 가라." 막상 글로 적으려니 정확한 워딩이 생각나지는 않는데 대략 이런 말이었다. 재능이 아까우니 썩히지 말고 꼭 대학 가라고. 그래서 더 좋은 그림 그리라고. 아이들도 놀랐고 나는 더 놀랐다. 그때 분위기와 선생님의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보람됐다. 늘 공부는 뒷전인 내가 그림을 좋아해서 예중, 예고에 들어가려고 노력했다가 낙방했는데. 그래서 인정받지 못했고 실력이 없다 생각했는데. 고등학교에 와서 선생님이, 그것도 반 아이들 앞에서. 칭찬을 해주시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림 그린 보람이 없는 건 아니구나. 그래 내가 좋아하는 그림, 미술이 이런 거였어. 선생님의 격려와 조언이 힘들 때 가끔 생각난다.
그런데 결과부터 말하면 선생님의 바람대로 난 대학에 가지 못했다. 또 낙방했다. 역시 내신이 문제였다.(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림 실력이 안 됐을 수도. 이유야 모르지만 어쨌든 낙방했다. 졸업하고는 밴드 활동을 했기에 입시를 치르지 않았고 1년 뒤에 수능을 보고 입시를 치렀다. 낙방했고 영장이 나와 군대에 입대했다. 지금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 같아서는 대학에 가보고 싶기도 하고 아니면 음악을 더 해보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