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가 익고 삶이 익어가는 순간
어바인에서 1시간 30분쯤 아래로 내려가면 ‘테메큘라’라고 하는 캘리포니아의 대표적인 와이너리가 있다. 50여 개의 와인 양조장과 포도밭이 있는 곳이다.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테메큘라에 있는 귤 농장에 귤 따기 체험이 있다고 해서 와이너리도 들를 겸 다녀왔다.
가을 햇볕이 따가운 11월의 토요일, 아침부터 준비해서 도착하니 11시다. 아직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비스듬히 경사진 귤 농장에서 귤을 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입구에 들어서니 양파망 같은 주머니를 하나씩 나누어 주신다. 한 망 가득히 담으면 25불이란다. 테이블 위 상자에 맛볼 수 있는 귤을 하나 까먹어보니 진짜 달다. 욕심이 생기어 두 주머니를 챙겨 들고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이 보는 것보다 가팔랐다.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맛있게 생긴 귤을 찾기 시작했다. 아직은 초록빛이 많이 보이는 익지 않은 귤도 많았다.
“껍질이 적당히 야들야들하고 작은 귤이 맛있어,”
어떤 귤을 따야 할지 모르는 아들에게 나는 말했다.
“너무 단단한 귤은 따지 마” 이런저런 말로 맛있는 귤이 어떤 건지 설명하려다가 그냥 네가 따고 싶은 귤을 따봐.하고 아들에게 귤 망을 내밀었다. 아들 눈에는 껍질이 반들반들하고 초록빛이 살짝 도는 귤이 맛있어 보였나 보다.
한참을 따서 모아봐도 한 망을 다 채우기가 힘들다. 너무 욕심을 냈나. 저 위를 보니 레몬 나무에도 레몬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한국에서 사서 먹던 크고 단단하고 샛노란 레몬은 아니다. 약을 치지 않고 오로지 햇빛과 바람에 익어가는 알이 작고 껍질이 야들야들한 귀여운 레몬이다. 아들은 이제 귤은 그만 따고 레몬을 따고 싶다고 했다.
“엄마. 이거 따면 집에 가서 레몬에이드 만들어줘”
“그럼 20개 정도는 따야지. 엄마가 레몬청 만들어 레모네이드 해주지”
그 말을 듣고 다시 힘이 생긴 아들은 레몬을 따기 시작한다. 자기 주먹만 한 앙증맞은 레몬들을.
귤 농장에서 나와 테메큘라 올드타운에서 바비큐립으로 점심을 먹고 테메큘라 와이너리로 향했다. 널따란 대지에 포도나무들이 끝없이 보이기 시작했다. Wilson creek이라는 제법 큰 와이너리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차가 가득하다. 겨우 주차하고 들어가니 야외 잔디밭에 와인을 마시며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적한 길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북적북적한 파티 분위기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하기가 힘들어 조금 한적한 와이너리를 다시 찾아갔다. Ponte winery.테이스팅 룸 뒤로 분위기있는 정원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테이스팅 룸안에는 아이들은 들어갈 수 없어 정원으로 가보니 테이블마다 와인을 즐기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해가 기울어 빛이 긴 그늘을 만들 무렵이라 그런지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아니 하나의 그림이 생각났다.
덴마크의 화가 크뢰위에르가 그린 <만만세>라는 작품이다. 초록 나무 밑으로 한낮의 햇볕이 얼굴을 비추고 와인에 취해,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의 표정은 생기가 넘친다. 아마도 친한 친구들이나 가족끼리의 만남이리라. 손에 들고 있는 잔을 위로 올리며 건배! 하는 외침이 그림 속일지라도 밝고 경쾌하게 느껴진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잔디밭에 모인 사람들, 햇볕과 바람과 사람에 취해 소곤소곤 때로는 왁자지껄하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 속에서 살아 움직여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바람은 잔잔하고 와인은 부드럽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은 귤이 익고, 포도가 익는 그곳에서 더 빛을 발했다.
해가 벌써 떨어지는 시간이라 우리는 잠시 감상한 뒤 집으로 향해야 했지만, 다음번 방문 때는 느긋하게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 묵으며 와인투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집에 와서 따온 귤을 보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귤이 많다. 못생기고 상처는 많아도 엄청 달다.
그릇 가득 귤을 담아놓고 계속 까먹으며 앞으로의 날들을 상상한다.
와이너리 정원에 앉아 햇볕을 받으며 좋은 사람들과 “짠” 잔을 부딪치는 그때를.
귤이 익고 포도가 익는 그곳에서 나도 삶이 익어가는 순간을 맛볼수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