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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Feb 04. 2024

새벽 세 시

새벽 세 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잠이 깬다. “내 새끼, 깼어?” 갓 집에 온 듯 엄마는 외투도 벗지 않고, 화장도 지우지 않았다. 엄마가 몰고 온 찬 기운에 난 이불 속을 파고든다. “엄마, 나 내일 주번이라 학교 일찍 가야 해.”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 새끼, 내 새끼는 엄마처럼 살면 절대 안 돼.” 담배와 소주 냄새가 난다. “네가 우리 집을 일으켜 세워야 해.” 엄마는 열네 살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내가 전교 1등을 하지 않으면 우리 집이 망한다는 듯이. 공부 잘하는 친구들 이름을 나열하며, 왜 그 애들보다 공부를 못하냐고 닦달한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해 수업 시간마다 엎드려 잔다고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다.


자고 싶다. 새벽에는 평범하게 자고 싶다. 엄마는 옆 방에 곤히 잠든 한 살 어린 동생은 깨우지 않고, 매일 나만 깨운다. 내가 우리 집을 일으킬 맏딸이니까. 그해 엄마는 실직한 아빠를 대신해 호프집을 열었다. 낮에 집안일을 하고, 밤에 출근해 새벽에 퇴근했다. 그 시절 엄마는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졸음이 쏟아졌지만, 하소연하며 우는 엄마를 두고 잘 수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시달리면, 어느샌가 엄마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잠들었다 깬 난 엄마가 새벽에 사 온 삼각김밥을 먹었다. 호프집을 하기 전 엄마는 아침마다 찌개를 끓이고, 나와 동생의 도시락을 쌌다. 밥 짓는 냄새가 사라진 아침, 마스카라가 번진 엄마가 일어나 옆집으로 갔다. 무허가 컨테이너집이라 물이 나오지 않아 매일 옆집에 사정해 호스로 물을 받았다. 나는 들통을 들고 기다렸다. 엄마는 그 들통을 가스레인지에 올려 데웠다. 데운 물로 세수를 하고 교복을 입고 나서면 엄마는 이미 암막 커튼이 쳐진 어두운 안방에 들어가 잠들어 있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식탁 위에 만 원이 있었다. 나는 돈을 쓰지 않고 김치볶음밥이나 간장 계란밥을 해 동생과 먹었다. 친구들이 가자는 H.O.T 콘서트도, 놀이공원도 가지 않았다. 보일러는 틀지 말자, 그건 또 왜 샀냐. 가족들의 소비에도 잔소리했다. 돈을 아껴야 엄마가 하루라도 빨리 호프집을 관둘 수 있으니까. 잠자는 시간이 뒤바뀌는 것이 얼마나 건강에 좋지 않은지, 밤길을 걷던 여자가 어떻게 살해당는지 기사를 접할 때마다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가 1분이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안심하고 잠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작 엄마가 집에 오면 나는 잘 수 없었다.


아빠는 사람이 밤낮이 바뀌면 병이 난다는 속없는 말을 자주 했다. 누구 때문인데. 음주 운전으로 실직한 후 아빠가 하는 거라고는 술 마시는 일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아빠는 집 밖에 세워둔 LPG 가스통을 들고 들어와 같이 죽자고 했다. 엄마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면서. 동생도, 엄마도 없었다. 아빠는 왜 나랑 죽고 싶었던 걸까? 맏딸이라서? 나는 악을 썼다. “죽으려면 아빠 혼자 죽어.” 차라리 엄마가 바람을 피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탈출하게. 아니, 아빠 말이 사실일까 봐 무서웠다. 엄마가 나도 버리고 갈까 봐. 그날 밤 LPG 가스통을 혼자 낑낑대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아빠가 죽자고 했다고,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새벽에 지쳐 들어온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나를 제왕절개로 낳았는데, 배꼽 아래부터 성기 위까지 10센티 가량 세로로 된 흉터가 있었다. 그 흉터는 마치 밧줄을 새겨놓은 것처럼 튀어나와서 엄마는 주정할 때마다 내 손으로 그 흉터를 만지게 했다. “엄마 지금 새벽 세 시야.” 사정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내가 그만큼 소중한 아이라고 했다. 이런 흉터가 생길 만큼 힘들게 낳은 아이라고. 나는 성적으로 꾸중을 듣는 것보다 흉터를 만지는 게 더 싫었다. 그 흉터는 마치, 너만 없었으면 상처는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잠을 자지 못하고 일하는 것도, 옆집에 수도를 열어달라고 사정하는 것도, 안 마시던 술을 마시는 것도 모두 내 탓인 거 같았다. 지금도 그 울퉁불퉁하면서도 매끈한 흉터를 만질 때의 느낌이 선명하다.


열네 살 때부터 일주일에 두세 번 반복되던 엄마의 새벽 하소연은 열아홉이 되어서야 멈췄다. 나는 고3이 됐고, 엄마는 호프집을 계속 운영했지만 그 사이 아빠가 복직해 집안 사정이 나아졌다. 하지만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아빠와 싸우면 감정을 쏟아냈다. 많은 말을 하면서도 사채 빚, 음주운전 같이 중요한 문제는 꽁꽁 숨겨 문제를 크게 만들었고, 수습은 내 몫이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울었고, 나는 엄마를 달랬다. 가끔 엄마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동생을 보면 신기했다. 나는 엄마에게 내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 엄마 배에서 처음 나온 아이가 아니었다면, 달랐을까. 나도 응석을 부리고, 힘든 이야기도 할 줄 아는 아이로 자랐을까. 엄마가 와서 팔을 베라고 할 때 목에 꼿꼿하게 힘주지 않고 편하게 벨 수 있었을까. 엄마는 가난한 시절 나에게 책과 교복을 살 용돈을 줬지만, 내 얘기를 묻거나 듣지는 않았다. 엄마는 말하는 사람, 온갖 속상함을 쏟아붓는 사람이었다.


언젠가부터 엄마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화가 났다. 사랑한다면서 날 알아 보지 못하는 엄마가 미웠다. 새벽 세 시, 기댈 곳도 도망칠 곳도 없던 내가, 옆방에서 자고 있던 동생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열네 살 아이라는 걸 엄마가 알아보길 나는 바랐다.


서른이 되었을 때, 엄마를 앉혀놓고 물었다. 내 장점에 대해 세 가지만 말해달라고. “분리수거 잘하는 거, 물건 아껴 쓰는 거.” 엄마는 두 가지를 말하더니 갑자기 성을 냈다. 네가 쪼잔해서 걱정이라고, 그렇게 아끼면 사람들이 싫어할 거라고 했다. 눈물이 터졌다. 우는 내가 별나다며 엄마는 등을 돌려 TV를 켰다. 나는 굴하지 않고 울었다. “겨우 세 가지를 말을 못 해.” 엄마가 마지막 장점까지 얘기했다면 뭐가 달랐을까.


같은 해, 내가 서울에 집을 구해 나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독립하면 죽어버릴 거라고 했다. 외로워서 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나는 말없이 조금씩 애인과 사는 집으로 짐을 옮겼다. 엄마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양말 한 짝 남기지 않았다. 엄마는 죽지 않았다. 노래교실도 나갔고, 친구와 여행도 다녔다. 그제야 나는 이것이 나만의 독립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내가 엄마를 지키고 서 있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나긴 새벽 세 시로부터의 해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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