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6 : 지하철, 붉은광장, 국립박물관
쾌청하고 넓은 도시였다.
9월의 마지막을 달려가고 있는 모스크바에는
벌써 시베리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러시아 사람들도 외투를 입고 다니건만,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온 나는 과감하게 후드티 하나로 러시아를 누비고 있었다.
(9월의 한국은 더웠기에. 나는 추위를 몹시 많이 타면서도
반팔티셔츠를 포함한 옷 몇 벌, 그리고 구멍이 숭숭 뚫린 카디건을 챙겨간 상태였다.)
일단 숙소를 찾아야 했다.
트렁크와 커다란 배낭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구글 지도를 이용해서 버스를 갈아타며 숙소로 향했다.
(이렇게 오천 원, 만 원 열심히 아껴서 멍청 비용으로 한꺼번에 지출한다)
아침 일찍 이르쿠츠크에서 넘어와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라 몹시 배가 고팠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모스크바 현지 식당에서 손짓 발짓 하기도 힘들었다.
그때 발견한 KFC와 피자헛은 사랑이었다.
햄버거와 콜라로 몸과 마음을 든든하게 한 뒤
다시 숙소를 찾아 헤맨다.
나는 이 여행에서 거의 모든 숙소를 에어비앤비(www.airbnb.co.kr)로 해결했다.
가격도 호텔에 비해 저렴할뿐더러
사람 사는 곳을 직접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타인과 금세 친해지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에(...)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하기도 싫었다.
유일한 단점은 주거지역(호텔에 비해 시내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에 있다는 것과
캐리어를 돌돌 끌고 찾아가기 고되다는 것.
그래도, 그 과정이 여행이었다.
내가 머문 곳은 멋쟁이 아주머니가 사는 곳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홍차와 쿠키를 대접받았다.
건물 외관에 비해 방이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샤워시설은 영 좋지 않았다...)
짐을 잽싸게 풀어놓고, 모스크바 한가운데로 향했다.
주인 아주머니께서 '추우니 외투를 입고 가라' 말씀하셨는데
차마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부끄러워
"스파시바(спасибо, 고맙습니다)" 만 외쳤다.
여기서 잠깐.
러시아의 지하철은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들이 유난히 깊숙하고 화려한 것이 '제대로 신경을 썼구나' 느끼게 하는데
다 이유가 있단다.
포털사이트 검색을 이용해보자.
웅장한 소비에트 지하철 시스템
모스크바 지하철이 지닌 가장 놀라운 특징은 대부분의 역이 웅장하고 화려한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인데, 이러한 역들은 차르 궁전의 내부를 닮게 치장되었다. 타일로 덮인 벽에는 소비에트 체계가 이루어 낸 결실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노동자, 농민, 군인들을 나타낸 매혹적인 조각품, 모자이크, 그림이 가득하다. 공산주의의 대의를 선전하려고 하는 계획적인 책략인 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스크바 지하철 [Moscow Metro]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늘 그렇듯이) 나는 모스크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분명했다. <붉은 광장>.
찌아뜨를나아야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갔다.
경험상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곳으로 향하면 그곳이 바로 목적지.
역시나, 이것저것 구경하며 걷다 보니 모스크바 붉은 광장이었다.
동화의 나라에 온 것 같았다
근엄하게 혁명을 부르짖던 모양새는 어디 가고
이토록 장난스럽고 알록달록한 장식이라니.
광장 정면에 위치한 이 붉고 거대한 건물은 무엇일까.
들어가 보고 싶었다.
<국립역사박물관>이었다.
(날이 몹시 춥고) 호기심도 생겨 박물관을 구경하기로 했다.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으면 사진 촬영이 가능했다.
나는 사랑스러운 아이폰6로 러시아의 역사를 기록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전혀 몰랐지만.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서 넓은 광장으로 나서는데.
누군가가 아름다운 미소로 내게 손짓하는 것이 아닌가.
(아까 몰래 찍은 사진 속)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내 팔짱을 끼며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는 신이 나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포즈도 바꿔가면서.
그리고... 순식간에 5만 원을 빼앗겼다.
한 사람당 1,000 루블(한화 약 2만 원).
총 세 명이니 3,000 루블을 달라고 했는데
내가 (최대한 비굴하게) 지갑을 열어 보이며 없다고 했다.
"나 2,550 루블이 전부야..."
그랬더니 스탈린 분장을 한 남자가 50 루블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져갔다.
50 루블은 너 가지라는 말만 남기고.
아아,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그 순간 새하얗게 머릿속이 텅 - 멈춘다.
그때 하는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멍청할 따름이다.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나는 한참 동안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터벅터벅 걸으며
스스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숙소로 가는 길,
그래도 다정했던 가로등 불빛.
모스크바에서의 첫날이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