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중앙화라는게 정말 가능한 것이기나 할까?
나는 블록체인에 대해 처음 공부를 시작하며 접했던 탈중앙화(Decentralization)라는 단어를 철저히 비즈니스 관점에서 받아들였다. 당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혁신을 이루어가는 그 역동성에 매료되어 대기업에서 나와 사업에 대한 고민들로 가득 찬 상태였던 나는 탈중앙화라는 단어가 주는 내러티브가 너무나 거대하게 다가왔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중개자의 비효율을 이 신뢰기계가 대신할 수 있고 신뢰에 대한 고민이 필요없는(Trustless)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의 상당수는 그야말로 파괴적 혁신(Destructive Innovation)에 직면할 것으로 생각했다. 블록체인이 내포하는 혹은 추구했던 철학적 관점은 사실 내 관심밖의 일이었다.
나는 비교적 다른 사람들에 비해 블록체인에 대해 늦게 입문했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스터디, 기술 밋업에 참석하고 진지하게 블록체인이 현실에 반영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사업적으로 고민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난 2년을 돌이켜 보면 이상과 현상은 너무나 간극이 컸다.
그럴듯한 비즈니스 모델을 그려놓은 백서의 뒷면은 새카만 먹지였고, 그야말로 광풍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던 암호화폐 투기와 그 욕망을 이용한 수많은 사기꾼들이 판을 어질러 놓았다. 이런 것들은 블록체인이라는 기술 자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이므로 논외로 하더라도 기술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상당히 높은 벽은 그 벽 너머에 예비된 약속의 땅을 의심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축적된 좌절들이 바탕이 되어 단순한 비즈니스적 관점에 더해 철학적 관점들이 들러붙기 시작했고 최근 하나의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동안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그렇게 강조되고 미덕으로 여겨졌던 탈중앙화라는 것이 실제로 추구되었던 것이었나?'라는 것이다. 권위와 권력, 구조적 우위로부터 파생된 부조리, 비효율, 편향적 규칙 제정을 배척하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는 것이 애초에 추구되었던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추구되었을 수 있고,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상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주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 생태계 내에서 권위와 권력은 존재하며 그 부작용도 여전하다. 오히려 전통적 체계를 이끌었던 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들을 통해 실행되는 주권은 (역시나 상대적으로) 불완전함으로 인해 더 많은 부작용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당시 그들이 이야기했던 탈중앙화는 실상 탈정치화(Depoliticization) 혹은 반문화(Counterculture)에 따른 권력재편(Restructuring)에 불과하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코드를 통한 탈중앙화라는 것 역시 누군가의 설계로 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애당초 탈중앙화가 가능한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여전히 블록체인의 잠재적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동안 블록체인을 돋보기로 들여다 보기 위해 애썼다면 지금은 한발짝 물러서서 냉정하게 상고해 볼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