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진희 Apr 12. 2024

3화. 당신이 던진 돌멩이 1

제왕절개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뜻밖의 소식을 전해준 담당 의사는 그 후 회진할 때마다 누워서 옴짝달싹 못 하는 내게 불쑥불쑥 돌멩이를 집어던지고 갔다.

  “엄마가 노산이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어.”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그에게 묻지 않았다. 혼자서 밑도 끝도 없이 툭 던진 말이었다. 묻지도 않은 것을 친절하게도 알려주었다. 그가 하나의 근거로 든 노산이 그래, 맞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이 내 심장에 꽂히는 화살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서른세 살 되던 봄에 결혼하고 나서 임신을 느긋하게 기다릴 여유는 별로 없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기혼자였고 학부모였다. 주변의 흐름과 상관없이 내 인생의 템포를 따라 산다는 생각은 아직 못할 때였다. 결혼을 할 거라면, 엄마가 될 거라면 30대에 하고 싶다는 바람을 20대부터 갖고 있었다.

임신에 성공하기까지 5년 동안 나는 내가 아는,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도전했다. 산부인과와 한의원을 다녔고, 몸에 좋다는 음식과 약을 먹었다. 배란 유도제 부작용으로 집안에서조차 걸을 힘이 없어 종일 누워있는 날이 있었고, 배꼽 아래에 뜸을 뜨면 임신이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응했다가 일반적인 뜸의 수준을 넘어서는 뜨거움에 발을 동동거리며 울기도 했다. 복싱과 등산, 걷기와 요가 등 늘 싫어하고 귀찮아했던 운동을 의지를 가지고 했다.


몸에 독소가 많아서 임신이 안 되는 걸까 싶어서 일주일 동안 단식하는 디톡스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일 년 여를 집에서 차로 왕복 4시간인 곳까지 매주 침을 맞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몸이 틀어져 있으면 임신이 방해받을 수도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오스테오파시(도수치료)를 받기도 했다.

처음 오스테오파시 물리치료사에게 문의 전화를 했을 때가 기억난다. 도수치료를 받으면 임신 성공률을 높일 수 있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찾아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나중에 물리치료사와 친해졌을 때 그때 왜 웃었냐고 물어보니 난생처음 듣는 얘기였다고 한다. 얼마 후 그가 휴가를 다녀온다고 해서 치료를 열흘 정도 쉰 적이 있었는데 독일에 가서 연수를 받고 왔다고 했다. 독일 측 교수진에게 내 케이스를 얘기하고 도움이 될 만한 방법도 배워왔다며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 했던 그가 고마웠다.

     

그렇게 자연임신을 기다리며 준비한 사 년여 동안 내가 정말 엄마가 되기를 바라는지, 왜 바라는지, 무엇을 위해 엄마가 되려고 하는지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했다. 아이 없이도 잘 살 수 있겠다가, 아닐 것 같았다가 괜찮았다가 불편했다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방황의 시간을 지나고 그 질문에 드디어 망설임 없이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 무렵, 난임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익히 들어온 난임 시술로 인한 여성의 고통은 가끔 떠올리면 지레 밤잠을 설칠 만큼 두려웠다. 고작 배란유도제 몇 알에도 맥을 못 췄던 경험이 있어서 더 두려웠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지만 곧 마흔이었고 엄마가 되기로 결정한 이상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나중에 더 뼈저린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때마침 2018년 정부가 난임부부 난임 시술 지원비를 확대한다는 소식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부부는 왕복 6시간이 걸리는 지역의 난임 전문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면서 기도했다. 내 인생에 둘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나, 그것도 욕심이라고 하시면 용서하시고 부디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한겨울에 병원 문턱을 처음 넘었는데 같은 해 한여름에 난임병원을 졸업했다.


집 근처의 산부인과로 옮기고 담당 의사를 처음 만났을 때 의사가 말했다.

  “그게 많이 힘든 건데 고생했네요.”

그건 그 의사의 앞에 마주 앉기까지의 시간을 압축해 놓은 말이었고, 그 과정을 어루만져주는 따스한 말이었다.

그리고 임신 중기를 넘어가면서 진료 횟수가 쌓이자 의사가 말을 놓았다. 반말이 조금 의아하고 껄끄러웠지만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 의사는 자기가 보지 못한 무섭고 떨렸던 나의 시간을 한 마디로 위로해 준 좋은 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반말하면서 내게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노산이 이유일 수 있다는 말은 정말이지 참혹했다. 한 해, 아니 한 달이라도 더 빨리 임신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스쳐갔다. 내가 더 젊었을 때에 임신했다면 우리 아기는 괜찮았을까. 그렇다면 그때 내가 더 노력하지 않은 건 뭐였을까. 내가 놓친 건 무엇이었을까. 답도 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폭주했다. 미칠 것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2화. 왜 그때는 몰랐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