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진희 Apr 24. 2024

4화. 당신이 던진 돌멩이 2

몇 시간 전에 배를 가르고 아기를 낳은 여자가 링거와 소변줄을 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의사의 말을 곱씹으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있으니 눈물은 나오기 무섭게 양쪽 윗 귀를 지나 머리칼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후 회진에서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오른손으로 숟가락질 시늉을 하며 말했다.

  "왼손으로 연필 쥐는 법 가르치면 돼. 밥숟가락도 왼손으로 하게 하고. 응?"


오른손이 불편하니 당연히 왼손으로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겠지. 틀린 말도 아니고 누가 모르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된, 아직 엄마는 보지도 못한, 말 그대로 갓난아기를 놓고 연필과 숟가락이 다 무슨 소용인가. 당신 말대로 장기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너무 앞서 나가는 말이었다. 그의 반말은 조금 의아한 정도에서 불쾌감으로 바뀌었다. 저 혼자만 가진 내적 친밀감에서 비롯된 반말은 이 상황과 내 감정을 가볍게 치부하는 것처럼 들려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분명히 환자의 아픔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랬던 사람이 왜 굳이 저런 말들을 계속하는 건지 답답했다. 누가 저 사람 입 좀 막아달라고, 이 방에 못 들어오게 해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에 왜 나는 그토록 부아가 치밀었을까. 생각해 보면 의사로부터 정작 듣고 싶은 말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늘 괜찮다고 했던 아기에게 이상이 발견됐으니 정밀초음파에서 자신이 잡아내지 못한 내용을 설명하고, 사과하기를 바랐다. 사과가 내키지 않는다면 유감이라도 정중하게 표현했으면 했다. 그랬다면 나도 그때 거기에서 그만 마무리를 짓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생략된 순서는 최근까지도 마음에 짐보따리로 남아 있었다.

    

의사가 입원실을 나간 후 나는 짐승처럼 낮게 울부짖었다. 깊은 뱃속에서 올라오는 신음 섞인 고통의 울음이었다. 그때 방을 나갔던 의사가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는지 다시 방문을 열었고, 내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내 앞에서는 안 울더니 혼자 있을 때는 우는구나.”

의사가 헛소리를 멈춘 것이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회진 중 꼭 필요한 정보만 전달하고 서둘러 방을 나간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 후로는 나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빨리 퇴원하고, 조리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미워하는 게 괴로워서 그를 이해해보려고 했다. '저 사람도 놀랐겠지.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어도 속으로는 마음 편치 않을 거야. 당황스러우니까 자꾸 말이 헛 나오는 거고.' 

사과하지 않는 이유도 추측해 보았다. '속으로는 미안할 거야. 그런데 사과를 하자니 우리가 문제 삼을 거리를 주는 걸까 봐 겁이 나는 걸 수도 있어.' 마음은 한결 진정되었지만 미운 감정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임신 기간 동안 정기검진을 놓친 적이 없었다. 열 달 동안 태아에게 이상 신호가 발견된 적도 없었다. 늘 잘 크고 있다는 말에 흐뭇해하며 돌아왔다. 임신 중기 정밀 초음파 검사에서 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태아의 발가락과 손가락을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개수를 세던 의사의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남편과 나의 기억이 다르다. 나는 열 손가락이 다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억했고, 남편은 아기가 오른손은 보여주지 않아서 다 세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나는 막연한 기억이었고 남편은 구체적인 기억이어서 남편의 기억이 맞을 거라고 여겼다. 남편은 낳기 전에 알았으면 얼마나 걱정하고 불안했겠느냐며 차라리 지금 알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기자고 했다. 간혹 이런 일로 소송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아기에게 집중하자고 말했다.


  "선생님, 초음파 검사할 때 아무 이상 없다고 하셨잖아요?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라는 말이 하고 싶어서 입술이 간질거렸다. 초음파 검사 시 태아의 손발이 잘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고지하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 산모에게 자세를 바꿔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그날 확인이 안 될 경우에는 재검을 받게 하는 의사도 있다는 것은 한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의사에게 꺼냈어도 되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의사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을 생각해 보았다.

  “이런 말씀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힘드시겠지만 지금은 회복에 집중하시고 마음 잘 추스르시길 바랍니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랐던 것일까. 시간이 흘러도 본의 아니게 상처에 소금을 뿌린 그 서투름까지 포용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가 나를 만났던 경험으로 조금이라도 달라졌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당신은 의사이니까. 아픈 사람을 최전선에서 만나는 사람이니까.     

      

출산 후에 알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기라는 말을 주변인들은 많이 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건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마 양수천자검사 같은 더 복잡하고 힘든 검사를 받느라 고생했을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태아의 상태에 대해 더한 우려를 들을 수도 있었을 거다. 걱정이 걱정을 낳고 낳아, 행복한 태교는 물 건너갈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게 의사가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출산 전에 미리 알았다면 마음의 준비를 했을 테고, 그렇다면 출산 후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소중한 시간들을 염려와 눈물로 보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악다구니하는 상상을 종종 했다. 그때 말했다면 그 후로 한참을 못한 말을 속으로 해대며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원망의 대상을 찾았던 게 아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다음 발걸음을 위해 지금 이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 의사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었다. 소독을 받으러 진료실을 찾았다. 자연분만이 아니어도 수술 부위와 함께 질 소독을 받아야 했다. 서로 껄끄러운 사이가 된 그 의사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누워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견디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었다. 


소독이 끝나고 의자에서 내려왔는데 소독솜이 닿은 부위마다 몹시 따갑고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나오기 직전에 밑이 너무 따갑고 아프다고 말했더니 의사는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별수 없이 찝찝한 기분으로 진료실을 나와서 수납하는데 간호사가 나를 부르며 쫓아왔다. 나는 다시 의사 앞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원래는 내가 쓰는 약품이 따로 있는데 오늘은 그걸 안 쓰고 다른 걸 썼거든. 간혹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닦았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던 그의 말은 틀렸다. 한동안 소변을 보는 것조차 아파서 동네 산부인과 치료를 다녀야 했으니까. 영 좋게는 마칠 수 없는 인연이었을까?


응어리진 채로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우리 아이처럼 손이 다르게 태어난 아이의 엄마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머리 숙여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의사에게 화를 냈다고 했다. 왜 미리 발견하지 못했느냐고, 아무 이상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울며 소리쳤다고 했다. 사과를 했다는 의사의 얘기에 나는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사과를 하는 의사도 있네요. 사과도 받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으니 그래도 마음에 응어리는 안 남았겠어요.”

그런데 그 엄마의 대답이 의외였다.

  “아니요. 더 해대지 못한 게 아쉬워요.”     

그게 그런 걸까? 대답을 듣고 멍해졌다. 비슷한 사건을 겪어도 펼쳐질 경우의 수는 여럿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화내지 않았어도 그 의사는 사과했을 것 같았고, 나는 화를 냈어도 그 의사로부터 사과는 받지 못했을 것 같다는 확신이 피어올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상하게 마음이 정돈되고 차분해졌다. 더 이상 그때 의사에게 꺼내지 못한 말이 내 속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3화. 당신이 던진 돌멩이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