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완성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론
얼마 전 “관리자급 개발자가 되기 위한 자세”라는 글을 쓰고 얼마 안 있어 벅스뮤직 직원한테서 연락이 왔다.
“저희 양주일 대표님께서 문대표님과 만나 저녁식사를 하고 싶으시다는데 가능할까요?”
직원 왈, 양대표님 본인도 개발자 출신인지라 공감이 많이 가고 자신의 옛날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는 것이다.
NHN엔터테인먼트 회장님의 총애를 받으며 벅스뮤직과 티켓링크 두 개의 회사를 맡고 있는 대표가 나를 만나겠다는 데 마다할 이유도 없겠지만 그보다, 공감하는 글을 보고 유명하지도 않은 저자와 만나 식사를 하시겠다는 분이라면 더욱 범상치 않겠다 싶어 흔쾌히 수락했다. (대표들은 엄청 바쁜데 말이다.)
삼성동에서 양대표님이 저녁 식사를 사고, 내가 2차로 맥주를 사서 마시며 정말 오랜만에 대표로서 맘에 담아 두었던 어려운 점들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스타트업 대표가 되니 이렇게 업계의 유명한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많아지고 때로는 그들을 알아 가는 게 즐거움이자 보람이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생각도 하고 있다. “만약 내가 와이퍼 사업 후에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사회에서 잘 나가는 리더들의 성향과 공통점, 자라온 환경 등을 분석해서 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
물론 나름대로 독특한 접근법을 생각 중에 있지만 아직은 먼 얘기니 쓸데 없는 상상일 뿐이다.
아무튼 이런 것과는 별개로 전부터 가지고 있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경이로움을 단편적으로 구조화 할 수 있는 계기가 이번 만남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전부터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사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몸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두 개 회사의 대표가 되어 젊은 나이에 쉽지 않은 시장, 복잡한 조직, 어려운 과업을 실행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더랬다.
양주일 대표는 개발자로 경력을 시작한 4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대표이다. 게다가 내 글을 읽고 말했듯 본인도 개발자일 때에는 ‘안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하니 짧은 인생을 200% 극단적인 효율만 경험한 사람도 아니다.
길어 봤자 10년 정도 되는 시간으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비해 바닥과 천장으로 구분될 정도로 사회적 경험과 선천적 유전자의 힘이 큰 것일까?
카카오의 임지훈 대표, 넥슨 박지원 대표, 쿠팡 김범석 대표 등은 모두 30대인데, 그 정도의 시간을 열심히 일하다 보면 요즘 같이 복잡한 시장과 조직을 관리할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걸까?
어찌 보면 젊은 사람이라고 조직의 대표가 되지 말란 법이 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대기업을 경험하며 오히려 거기서 보게 된 복잡성과 연륜을 필요로 하는 의사결정 스킬은 단순히 시간이 간다고 체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양대표와의 만남에서 얻게 된 통찰을 말해볼까 한다.
양대표와의 만남이 즐거웠던 건, 우리가 서로의 상황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기도 했으며 특정 사실에 공감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내가 대표로서 느꼈던 어려움, 내가 살면서 깨닳은 사실들, 내가 사람들에게 주장하는 철학을 이야기할 때 마다 양대표는 본인의 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어떤 주제에 이르게 되면 그에 해당하는 책의 제목을 하나씩 말하며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대표의 철학을 직원들에게 이해시키는 게 어렵다는 대목에선 <사장으로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말해 주었고, 조직의 목적과 개인의 목적에서 괴리가 발생할 때의 모순을 이야기할 때에는 <텅빈 레인코트>를, 리더로서 스타트업 조직 문화를 고민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피플웨어>를 추천해 주었다. 이렇게 하룻저녁의 대화에서 양대표가 나에게 추천해 준 책만 아홉 권이다.
만남 이후 주말에 동작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기 시작했다.
<텅빈 레인코트>를 읽을 때였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건 양주일 대표가 나에게 공유해 준 하나의 프로그램 모듈 같다”
프로그래밍을 하는 사람이라면 안다. 어떤 프로그래머한테 “지금부터 날코딩 해서 윈도우즈를 만들어 주세요”라고 한다면 설령 그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프로그래머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초창기 시절엔 C언어나 어셈블리로 타인의 코드 없이 잘 나가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인터넷에 올라온 타인의 소스 코드를 copy & paste 하지 않으면 메신저 하나를 만들기도 불가능할 정도이니 운영체제 급이라면 어떨까?
그때 든 생각이, 인간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진정으로 필수적인 건 역시나 책이라는 결론이다. 당연해 보이면서도 와 닿지 않던 결론을 양대표와 대화하며 확인한 거다.
그냥 “필요하다”가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만으로는 인간의 위에 오르지 못한다. (위 아래의 개념에 오해가 없으면 한다. 주종적인 인간의 지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높은 의식수준과 격을 말하는 것이다.)
책을, 그것도 인문 사회 관련 서적을 섭렵하지 않은 사람이 인간의 운영체제가 되기 어렵다. 역사 서적을 섭렵하지 않은 사람이 조직의 운영체제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 책이야 말로 진정 높은 수준의 인간을 프로그래밍 할 때 필요한 오브젝트이다. 내가 직접 하지 못한 세상의 구조화를 누군가 실현해 놓았고, 내가 어떤 필요성을 느낄 때 찾아 보게 됨으로써 그것이 명확하게 내 메모리 안에 할당되어 나를 완성해 가는 것이다.
대기업에서 제대로 달려 가는 리더들 치고 적극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며 아마도 양대표와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잘나가는 회사의 젊은 대표들 또한 책을 통해 자신의 연륜을 보강해 왔을 것이다. 나 또한 개발자의 티를 벗고 무언가를 분석하여 기획하고 조직을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증폭되었을 때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후 “다음에 읽을 책이 고민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였다.
인문, 역사에 대한 독서 히스토리가 빈약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만으로 어떠한 큰 일을 주도할 때 여지 없이 한계가 드러나곤 한다. 그들의 한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판단의 스펙트럼이 협소해서 더 많은 “가능 영역 탐색”을 하지 못하고 그저 깊이 없는 지식으로 빠르게 의사결정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보기엔 맞는 것 같지만 수 많은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 보지 않고서는 본질이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기가 힘들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독서를 위해 책을 고르는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꿈을 찾는 과정과 비슷하고 때로는 두 과정이 일치할 때도 있다.
젊었을 때 한바탕 호르몬 잔치를 벌이는 시기가 지나 인생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시기가 올 것을 대비해, 또는 이미 그 시기가 온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구조화 해 줄 책을 끊임 없이 찾아 읽기를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자신이 즐기던 것을 더 이상 즐기지 못하고 목적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책을 매개로 한 대화에서 조직과 시장에 대해 고민하는 대표의 깊이를 보게 됨으로써 벅스뮤직을 다시 보게 되었고 배달 손세차 사업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독서를 잠시 접어 두었던 나를 반성하게 해 준 양주일 대표에게 감사한다.
지인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겠다 싶어, 다음글의 주제는 초보자를 위한 “책을 잘 읽는 방법”으로 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