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의 삶과 일은 '누구를 모시는가'에 의해 대부분 결정된다.
보스 얘기는 어지간하면 안 적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를 빼 두고는 별로 적을 수 있는 글이 없어서 몇 가지 에피소드만 기록해보려고 한다.
나의 경우 회사에서 다른 업무를 보다가 스카우트 (내지는 차출) 된 것이어서 정말 구린 보스라면 거절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실무자가 회사에서 경영진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있겠으며,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는가.
내가 가지고 있던 정보라곤 회사 홍보 영상에 등장한 짧은 클립들, 그리고 오다가다 그를 마주쳤을 때 관찰한 평소 패션 정도였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처음 회사에 입사한 날 선보였던 '형광색 셔츠'였는데...
이런 색깔인데 나름대로 카라도 달린 '셔츠'였다.
저런 건 어디서 샀나 싶어 비슷한 이미지를 아무리 서치 해도 못 찾겠는 걸 보면 아무래도 평범치는 않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우리 회사에서 당당하게 이런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모습이 마치 새로운 인류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국 아저씨가 차고 넘치는 남초 회사에서 혼자 형형하게 빛나는 셔츠를 입는 미국인 상사. 어쩐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의 비서가 되어 처음 인사를 한 날, 나의 보스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산 지 1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레이벤 선글라스를 머리에 척 얹은, 러닝화 차림의 그 앞에서 내 '비즈니스 캐주얼' 원피스는 어쩐지 머쓱하리만치 어색하게 느껴졌다.
보스가 등장하는 영화를 찍을 일이 있다면 이 형광 노란색은 그 후의 일들을 암시하는 영화적 장치로서 적극적으로 쓰여야 할 것이다. 빛이 나면서도 지나치게 튀는, 밝으면서 한 편으로 '경고'의 색이기도 한 노랑. 그것도 형광 노랑.
우리 회사를 바꾸러 온 외지인 사장,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오 마이 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