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ingS Aug 21. 2022

너라는 사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8년 5개월가량이 되도록 나는 단 한 번도 야무진 적이 없었다.

우산은 예사로 잃어버리고 휴대폰의 위치란 언제나 오리무중. 분위기 좋은 식당에 가도 물컵을 엎지르고 와인을 쏟고 옷에 음식을 흘렸다. 정신 좀 차려. 이전의 연애들 속에서는 분명히 애정을 담은 충고라는 명목으로 그런 말을 참 많이도 들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너는 냅킨이나 집어줄 뿐 아무 말이 없었지.


언젠가 함께 주말을 보내고 새벽에 집을 나서는 내게 너는 잠도   얼굴로 손을 저어 인사를 했다. 무심하던 너와 나는 한참을 만나고도 서로 배웅까지는 하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뭐 딱히. 문을 밀어 열고 - 추워.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날따라 웬일인지 이불 밖으로 나온 네가 새하얀 후드 재킷을 집어주기에 나도 모르게 거절을 했던 순간이 기억나.


분명히 여기에 케첩이나 고추장을 묻힐 걸. 됐어. 나는 그 순간 매력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것처럼 너는 내 옷 중에 이게 너한테 제일 잘 어울리니까. 하고 대답했다. 도저히 하얀 옷을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아 현관에 한참을 서있으려니 너는 나를 문 밖으로 밀어내고 추우니까 문 닫는다. 잘 가 하고 정말로 코 앞에서 쾅 문을 닫았다.


생전 느껴본 적이 없던 감정이었다. 설레거나 떨리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고마웠어. 나는 그때의 네가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너무 고마웠다. 무수히 많은 내 실수를 겪고도 너는 새하얀 옷을 빌려 주었다. 그건 신뢰보다도 지독한 무언가라서 버티지 못하고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겼다. 심지어 닫힌 문을 눈앞에 두고 말이야. 때때로 이기적이던 너를 나는 그날 다 잊어버렸다.


하나의 인간. 나는 너에게 완전한 하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네가 내게 넘치는 위로나 끝없는 사랑의 맹세를 하지 않았던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다정하지도 다감하지도 않은 네게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이렇게나 마음을 내어주는 이유일까.


오늘도 주변을 살피지 않고 걷다가 발가락을 식탁 다리에 부딪혔고 아팠고 너는 딱히 위로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장실에 다녀온 후 식탁의 위치가 조금 더 안쪽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도저히 모르는 체할 수가 없어서 나는, 축구 경기를 보며 선수들에게 중얼중얼 불평을 해대는 네 팔을 껴안고 말았다. 오프 사이드가 뭔지 아직도 헷갈리는데 90분이나 그 재미없는 걸 같이 봤지 뭐야.


우리의 남은 날들도 아마 이렇겠지 생각해본다.

아니.

우리의 남은 날들도 제발 이렇기를 바라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손가락이 닿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