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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비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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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선 Aug 10. 2021

소리 나는 장난감을 모두 꺼버렸다

[400일] 더디게 크는 아이

국민건강보험에서 우편을 받았다. 이번에도 시답지 않은 보험료 안 내겠거니 했는데 수신자내가 아니라 아들이다.

영유아 발달 심화 평가 권고문이다. 이미 동네 소아과 권유로 대학병원 예약은 해둔 상태.

근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문서씩이나 받으니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입술이 바짝 마른다.

전기세 고지서보다 떨리는

아들은 사회성과 언어영역에서 또래 아이들보다 발달이 느리다고 한다. 아내가 설문 작성을 한 거라 주관적인 판단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우리 아들이 좀 느린 편인 것은 사실이다.


처음 아이가 이상하다 느낀 건 채널A의 대표 프로그램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던 중이었다. (우리 엄마도 애정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날의 금쪽이는 자폐 스펙트럼 성향을 보였는데 보다 보니 우리 집 금쪽이와 너무나 비슷한 게 아닌가! 아내와 같이 웃으면서 보다가 나중에는 둘 다 심각해졌다.

육아는 오은영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지

아직 13개월이라 어떤 것도 단정할 수는 없지만 평균보다 더딘 것은 맞기에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다. 아내와 나는 서로 너무 걱정할라며 쿨한 척했지만 알고 보니 둘 다 관련 유튜브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중에 소리 나는 장난감이 많으면 발달이 지연될 수 있다는 영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착에 가까울 만큼 장난감 버튼만 누르고 그 기계음만 듣다 보니 발달을 할래야 할 수가 없겠구나 싶다. 영상을 보자마자 집 안의 모든 장난감 스위치를 꺼버렸다. 사내 아이라 그런지 유독 바퀴 달린 자동차 장난감을 좋아하는데 버스, 경찰차, KTX, 지하철 등등 전원 스위치가 없으면 아예 건전지를 빼버렸다. 우리 집이 졸지에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되었다.

잘가라 내 용감한 육아 동지들

지난 몇 달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 것은 아닌지 신경이 쓰인다.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아이가 장난감에 빠져있으면 쾌재를 부르며 짬짬이 내 시간을 가졌던 게 이제와 후회가 된다.(그렇다고 앞으로 안 그러리란 장담은...) 주식으로 그깟 돈 몇 푼 벌어보겠다고, 남 사는 거 인스타그램으로 훔쳐보겠다고... 옆에 없느니만 못한 아빠라는 생각까지 든다.


사실 요 몇 주 육아 우울증 비슷한  경험했다.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이 권태를 가져온 모양이다.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똥을 치우고, 잠을 재우고, 씻기고 하는 일의 반복. 아내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시간도 거의 없다. 애 재우다가 누구 하나 잠들어버리거나 깨어 있더라도 껍데기만 같이 있을 뿐이지 깊은 대화는 쉽지 않다.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심해졌고, 아이가 울어도 바로 달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아내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무엇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가 또래보다 느리다는 말을 들으니 퍼뜩 정신이 다. 내가 동기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만 했지, 내 새끼가 그러고 있을 줄이야. 나야 1, 2년 뒤쳐진다고, 하물며 새로 시작한다고 못할 거야 없. 그러나 아이는 아니다.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 내 새끼에게 충실할 것. 그것이 전업 육아 노동자로서의 책무이리라.


조금 더뎌도 괜찮으니 제발 건강하게만 자라줬으면 기도한다. 덧붙여 이번에 같은 문제로 맘고생하는 부모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자녀 불러도 쳐다봐주지 않을 때의 속 타는 마음. 그 마음들에 조금이나마 희망이 깃들기를 같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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