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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비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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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선 Apr 24. 2023

두 번째 진급 누락 그리고 1년

[1020일] 조금 늦게 쓴 나의 해방 일지

두 번째 진급 떨어지곤 세상에 미련 없는 사람처럼, 패잔병처럼 몇 달을 살았다.

밥벌이는 해야 하니 회사에 몸은 뒀지만 정신은 콘크리트 건물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할 말없는 임원은 일을 시키면서도 내 눈치를 봤고, 나는 독기를 감춘 채 영혼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끝나버린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가는 게 과연 맞을까?
상대방은 내게 사과하지 않는데 나 홀로 용서가 가능할까?
브런치에 쓴 글 중 가장 많은 응원을 받았던

끝없이 침전하던 나는 결국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9년 여 다닌 회사를 떠났다.

운이 좋았다. 욱하는 마음에 여기저기 올린 이력서를 보고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왔고, 꽤 긴 시간이 지나 합격 통보를 들었다.


문제는 아이였다.

가뜩이나 남들보다 느린 아이를 두고, 지금 내가 변화를 꾀하는 게 맞는지 몇 개월을 고민했다.

하원은 누가 시키며 저녁밥은 누가 주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결국 해답도 아이였다.

아이를 보고 용기를 냈다.

문득 아이 핑계로 내가 주저한다면 과연 아이가 커서 고마워할지 의문이 들었다.

그저 핑계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뒤는 어떻게 되든 저질러봐야 아이에게 해줄 말이 있지 않을까? 그 끝이 무엇이든.


전 직장에서 마지막 몇 개월은 구름 위를 걷는 듯했다.

임원, 인사팀과의 면담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잘난 척할 수 있었던 것도, 퇴직 인사를 몇 번씩 고쳐 쓰며 감상에 잠기는 일도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처럼 신이 났다.

마치 다시는 월급쟁이로 살 일이 없는 것처럼.


'때로 기뻐하고, 때로 슬퍼했지만, 돌아보니 모두 성장의 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배움의 골목마다 길을 내준 많은 분들께 가슴 깊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퇴직 인사 중에서-


특별히 고마운 사람들에게는 엽서를 남겼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 둥지를 튼 지 4개월째에 접어들었다.

눈을 뜨는 시각, 만나는 사람, 주어진 일도 모두 이전과는 달라졌다.

변화에 적응하느라 구내염은 나을 겨를이 없었고, 눈밑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아이와의 시간이 전의 반도 안되게 줄어들었다.

편도 한 시간 반의 퇴근길을 거쳐 집에 가면 아이는 멍한 눈을 껌벅이고, 아내는 지쳐 쓰러져 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묻는 내게 어느 임원은 말했다.

일과 가정은 균형을 찾을 게 아니라 분리를 해야 한다고.


그리하여 난 주중과 주말을 분리했다.

주말엔 집과 쇼핑몰이 아닌 곳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간다.

낯선 거리,  낯선 풍경으로. 예상치 못한 곳, 예상치 못한 것에서 아이는 환희를 보인다. 나의 의도가 무색할 만큼.

여행지보다 여행길의 기차를 더 좋아하는 아이


며칠 전에는 전 직장 팀 동료의 진급 소식을 듣고 기분이 묘했다.

만약 내가 남아있었다면 이번엔 진급할 수 있었을까? 진급을 했다면 기뻤을까? 슬펐을까?

내게 남아있는 이 감정은 미련인가, 원망인가, 아니면 후회인가?

사실 아직은 후회와 미련이 크다.

새로 둥지를 튼 곳에서 찬 바람이 불 때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다.

내가 외롭지 않도록 아무 조건 없이 곁을 내주던 많은 사람들, 눈에 훤하게 들어오던 업무들...

그냥 그대로 버텼다면 훨씬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 삶도 나름 괜찮았는데.


길었던 겨울이 지나 훈풍이 분다.

계절은 반드시 오고 마는 것처럼 이 모든 시간들도 결국엔 일상이 되고, 염증이 낫고, 가끔은 웃기도 하며, 아니 웃을 일이 더 많아지리라.

그렇게 믿고 나아갈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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