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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우 Feb 27. 2016

밥심

작문 스터디 #2015년 6월 13일 주제 : 부패

"냉장고에 반찬 새로 넣어뒀으니까 이번에는 남기지 말고 꼭 먹어."
"......"
[띠리리링]
엄마가 현관문을 닫고 돌아가자 방 안에 침묵이 은근하게 떠올랐다. 그다지 넓지 않은 이 고시원에서 자취한 지 햇수로 5년째. 좁은 이 방은 활기보다는 침묵이나 덧없이 흘러나오는 TV 소리가 어울린다. 엄마가 가고 난 뒤에야 저벅저벅 방 한쪽의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여니 가지런히 정돈된 반찬통들이 냉장고의 주황빛 불빛을 평온하게 쐬고 있는 듯했다. 따뜻해 보이는 그 불빛과 은근하게 시원한 냉장고 냉기가 잠시나마 멍한 정신을 깨우는 듯했다. 한참을 냉장고 문을 열고 서 있다가 냉장고의 경고음에 문을 닫았다. 동시에 기분 좋은 불빛과 냉기도 냉장고 안으로 사라졌다. 다시 저벅저벅 컴퓨터 앞에 익숙하게 앉았다.

'공. 사. 모' 카페의 새 글을 클릭해본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다. 동시 접속자  2만여 명이 매분 매초 새 글을 올리고 읽는다. 올해 모집인원이 많은 지역은 어디네, 컷트라인 점수는 어떠네, 족집게 인강 선생님은 누구네 하는 정보성 글들을 비롯해 힘든 마음을 털어 놓기도 하고 위로의 마음이나 새로운 마음을 다지는 글들이 올라온다. 이 사이트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위안을 얻는다. 지긋지긋한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준비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어린 시절 나는 공부도 곧잘 하고 꿈도 많던 생기 넘치는 아이였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대학생활을 정신없이 하다 보니 어느덧 졸업. 이력서 수십 개를 썼지만 죄다 고배를 마셨고 남 일 같던 '백수'라는 꼬리표가 어느새 따라붙어있었다. 두려웠다. 또 불안했다. 이러다 평생 백수로 썩는 게 아닌가. 남들은 어떤 분야에서 특출 나 보였지만 난 그렇지도 않았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야. 당장 뭐라도 시작해."
어렵지 않게 취업한 3년 선배의 충고에 당장 시작할 그 무슨 일을 찾다가 큰 물결에 휩쓸리듯 공무원 준비생이 되었다. '백수'보다는 '공무원 준비생'이 아무래도 나을 듯싶었다. 여느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그렇듯, 나도 노량진 학원가 근처에서 고시원 자취생활을 그렇게 시작했다. '뭐라도 하고 있으니 난 고인 물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호기롭게 시험을 준비했고  다음해에는 재수는 기본이라는 말에, 그 다음해는 공부한 게 아까워서, 그 다음해에는 눈높이를 낮춰 9급으로. 그렇게 쳇바퀴처럼 반복된 이유들로 5년이란 시간 동안 좁은 고시원에 고여있었다.

무기력한 일상이 당연해졌다. 엄마가 가끔 와서 냉장고에 채워두는 반찬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썩히기 일쑤. 인스턴트 식품을 사다 대충 때웠다. 나를 위한 밥상 하나 차리는 것조차 귀찮았다. 엄마는 매번 냉장고 안 썩은 음식들을 치우고, 또 새 반찬을 채우고,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당부만 남기시고 가셨다. 양손에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가장 익숙한 엄마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딸! 밥 잘 챙겨 먹어. 네가 좋아하는 숙주나물 두 번째 칸에 있다. 금방 쉬니까 얼른 먹고.]
엄마의 문자에 괜히 미안해졌다. 먹지도 않는 반찬을 주러 찾아오는 엄마가 귀찮고 내 모습이 부끄러워 괜히 엄마에게 날이 선 대꾸를 해왔었다. 그런데도 변치 않는 엄마. 엄마는 공무원도, 성공한 어떤 직장인도 아니었지만, 엄마는 내게 엄마 그대로, 그 자체의 존재로도 잔잔히 흐르는 맑은 물 같았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어떤 딸일까. 나는 고인 물처럼 되기는 싫었다. 썩어가고 있는 듯 보이기도 싫다.

냉수를 마시러 냉장고 문을 열었다. 기분 좋은 냉기, 가지런히 정돈된 반찬들이 다시 날 반겼다. 냉장고의 따뜻한 빛깔의 불빛이 괜스레 엄마와 닮아 보였다. 지금 내 눈앞의 가지런한 반찬과 반찬을 지키는 냉기가 그렇듯이, 엄마가 그렇듯이, 옆 방 고시원 사람이 그렇듯이, 고시원 바깥세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 자체가 가치 있게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상을 오랜만에 펴고 반찬들을 하나씩 꺼내 차렸다. 반찬마다 통에 꼭꼭 먹음직스럽게도 담겨있다. 나는 나를 위한 상차림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이 반찬들이 음식으로 채 쓰이지 않고 부패한 쓰레기로 변한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으셨으리라. 상해버린 음식들이 곧 고여 썩은 물처럼 딸에게 비칠까 봐 매번 그렇게 치우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으로 다시 채우셨으리라.

나는 오롯이 나를 위해 스스로 돌보는 그 자체로도, 고인 물이 아닌, 생생히 흐르는 물처럼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먹음직스러운 반찬을 잘 차려서 잘 먹고 착착 기운을 내서 할 일을 열심히 하면 그걸로 됐다. 그러면 괜한 음식이 썩은 것이 되지도 않을 것이며, 엄마도 그리고 나 자신도 알아챌 것이다. 나는 고여서 썩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를 위해 어떤 무언가를 하는 과정일 것이라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맛있게 반찬을 꼭꼭 씹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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