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점프 그리고 시작된 책 읽기
조조 모예서 "미 비포 유"
야간 근무를 위해 오후에 출근하는 남편이 현관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전화를 했다. 내 차의 열쇠를 갖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남편의 오래된 SUV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주차장에 갔더니 남편이 점프 케이블을 트렁크에서 꺼내 그의 오래된 SUV의 보닛을 열고 배터리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있었다. 내게서 차 열쇠를 건네받아 내 차를 그의 차 옆으로 주차시키고, 내 차의 배터리에 케이블을 마저 연결하고 남편이 차에 시동을 거니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남편의 오래된 차가 아파트 주차창을 빠져나가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스크를 쓴 입으로 작게 '점프 스타트'라고 말했다. 그러자 뉴올리언스의 습하고 뜨거운 오후의 공기가 떠올랐다.
"jumpstart." 다른 차의 배터리에 연결하여 차의 시동을 거는 것을 '점프스타트'라고 한다는 것을 나는 1996년 뉴올리언스의 대형 마트 주차장에서 처음 알았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어학연수차 머물던 뉴올리언스에서 나는 미국 나이로는 열아홉이었다. 운전면허증도 없었고 필요한 곳은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 소읍에서 자란 나는 그때까지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탄 적도 많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고, 운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한 적 없는, 자동차뿐 아니라 기계를 모르고 기계를 두려워하는 기계치인 내가 차가 없으면 참으로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던 곳, 미국. 그 미국의 뉴올리언스에서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로 벌어온 돈을 매달 생활비로 나눠 살아가고 있던 나와,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시아계 친구 두 명이 대만에서 유학 와 박사과정에 있던 나이 많은 아저씨의 낡은 차 앞에서 난감해하고 있었다. 집을 떠나와 타국에서 알뜰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우리는 2주일에 한 번 정도 식료품 쇼핑을 했는데 그 날은 알고 지내던 마음씨 좋은 대만 아저씨의 차를 얻어 타고 학교에서 떨어진 큰 마트로 갔다. 우리가 큰 봉지에 든 오렌지와 닭고기며 대용량 오레오 크래커와 밀러 캔 맥주 박스 등등을 낡은 차의 트렁크에 싣고 학교 근처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우르르 차에서 내려 친절한 대만 아저씨가 그의 낡은 차 보닛을 열고 난처하고 난감한 기색을 웃음으로 감추려 하는 것을 보고도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You guys wanna jump?" 매니큐어가 세련되게 발라진 손에 반짝이는 렉서스 자동차 열쇠를 든 내 또래의 여자가 우리를 보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가 우리를 도와준 건 그녀가 아시아계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을까? 나는 아마도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차의 배터리를 서로 연결하여 차의 시동을 거는 것을 영어로 점프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알고 참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뉴올리언스에서 배운 영어 중 가장 많은 이미지가 연결된 단어 "jumpstart". 가난했던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낡은 차와, 내 또래 여자의 세련된 친절함 앞에서 그녀의 친절에 고마우면서 동시에 그녀의 부유해 보이는 모습에 주눅 들던 내 마음을 감추기 위해 과장되었던 내 웃음과, 그리고 후덥지근한 뉴올리언스의 공기 속에서도 선명하게 반짝이던 그녀의 렉서스 자동차 열쇠.
책을 읽을 때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나는 뉴올리언스에서 인상 깊게 각인된 영어 단어 '점프스타트'가 생각난다.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영 읽기가 뚝뚝 끊기는 경우가 있다. 나의 책 읽기 엔진이 살아나지 않는 것이다. 작가가 이야기 속에 가득 충전해 놓은 에너지가 나의 책 읽기 엔진을 점프시킬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세 번의 점프를 시도한다. 세 번의 점프를 시도한 뒤에도 나의 책 읽기 엔진에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그 소설과 나의 '점프스타트'는 실패인 줄 알고 그 책 읽기를 포기한다. 소설 속의 이야기와 나, 우리 사인엔 맹렬하게 엔진을 달리게 할 스파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소설을 만날 때 첫인상을 중요시 여긴다. 첫인상에서 나를 소설 속으로 맹렬하게 점프하게 만드는 백만 볼트의 설렘이 없다면 아쉽지만 이별을 택한다.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는 세 번의 점프를 한 후에야 나의 책 읽기 엔진이 살아났다. 처음 읽는 작가였다. 특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렸다. 프롤로그와 처음 몇 장에서는 이야기의 세팅을 위해 부글거리는 거품처럼 주인공을 둘러싼 여러 주변을 주인공의 심리 상태와 비슷하게 또는 상반되게 만들어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었는데 부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영국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가 담긴 대화에 익숙해지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나의 경우 대체로 국내 작가의 소설보다 외국 작가의 소설을 읽기가 더 어렵다. 외국 작가의 소설의 경우 나의 첫 번째 점프는 대개 실패한다. 그래서 첫 번째 점프 실패는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곧바로 두 번째 점프를 하였다. 두 번째 점프는 이야기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소설의 줄거리가 "사랑을 위하여"로 우리나라에 개봉된 "다잉 영"이라는 영화의 내용과 비슷했다.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릴 만큼 병으로 인한 고통에 속에 살아가는 남자와 그를 간호하기 위해 고용된 여자 간병인, 이 둘의 애달픈 사랑이야기.
책을 덮고 앉아 있는데 책 표지에 있는 이 소설에 대한 여러 언론의 리뷰가 보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나에게는 백만 볼트 전류의 설렘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가 싶어 골똘히 앉아있는데 큰 아이기 와서 "뭐하고 계세요?" 한다. "어, 이것 봐. 이렇게 좋은 책이라는데 엄마는 그저 그런 것 같아"하며 책의 표지를 보여주자, "에이 어머니도, 원래 이런 데는 좋은 이야기만 해주는 거예요!" 한다. '그래? 그럼 정말 이런 찬사를 받을 만큼 멋진 이야기인지 어디 한 번 다시 읽어볼까?'하고 세 번째 점프를 했다. 부산스러운 이야기의 세팅이 정리되고 본격적인 소설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나의 책 읽기 엔진이 에너지를 받아 작동하기 시작했다. 한번 작동된 나의 책 읽기 엔진은 이야기를 따라 맹렬한 속도로 달렸다. 아이들의 저녁을 챙기고 작은 아이가 늦은 잠자리에 드는 것을 확인한 후 11시쯤부터 침대에서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535쪽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니 새벽 5시 43분이었다.
이 소설은 윌과 루이자의 이야기다. 세상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젊고 유능하며 적극적으로 인생을 즐기며 살던 윌은 사고로 사지가 마비된다.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의미 없다고 받아들이고 스스로 삶을 끝내려고 결심한 뒤에 옷을 '창의적으로' 입는 간병인 루이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지난 6년간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일하며 자신의 삶의 영역을 한정적인 공간에 제한하고 자신이 규정한 스스로의 모습에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스물일곱의 아가씨다. 제한된 공간과 시간이라는 서로에게 집중하기 그지없이 좋은 환경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가엾게 여기고 서로가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게 된다. 루이자는 윌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겠다는 마음을 돌려 다시 살아가도록 마음먹게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윌은 "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정해놓고 온갖 경험들을 아예 막아놓고"있는 루이자에게 제발 "남은 평생을 이 빌어먹을 식탁 매트나 파는 동네에 처박혀서 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라며 그녀가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괜찮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기를 바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흘려보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다시 맹렬히 가동하는 엔진을 달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바란다. 윌과 루이자는 동시에 서로의 삶에 점프 케이블을 연결하여 서로의 삶이 점프스타트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실제로 루이자가 윌이 원하는 대로 파리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윌은 결국 자신의 에너지로 루이자의 삶을 점프스타트 시킨 것이다.
글이 길어졌다. 다 쓰고 다시 읽어 보니 저 위에 뉴올리언스 이야기는 뺏어도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 나의 옛날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보니 나이가 들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래서 자꾸 나이가 들고 있는 지금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연애소설의 이야기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내 삶의 현재와 죽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오래된 SUV를 타고 출근한 남편을 가장 많이 생각했다. '내일 아침 그가 돌아오면 이런 이런 이야기를 나눠야지'라고도 생각했는데 막상 퇴근한 남편과는 일상적인 이야기 밖에는 나누지 못하고 말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소설과 실제 삶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천만다행으로 코로나 사태로 문 닫았던 도서관이 온라인 대출 예약제를 하게 되어서 책을 빌려 볼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우리 모두도 백만 볼트 에너지를 받고 어서 점프스타트 하여 부릉부릉 맹렬히 다시 일상의 삶을 가열 차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